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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입문

불교의 역사③ 중국

by 파장波長 2022. 4. 29.

불교는 인도에만 국한되지 않고 동방의 각국으로 전파되어 갔습니다. 하지만 최초로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인도로부터의 직접적인 전도가 아니었습니다. 중국불교 초기의 도래승(渡來僧)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인도 서북쪽의 서역지방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도불교가 서역지방에 전해져서 여기에 서역의 문화가 가미(加味)되어 다소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 바로 서역불교(西域佛敎)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도의 불교는 서역에 전해지고, 경전 등은 서역어로 번역되어 서역의 불교가 되었는데, 그것이 중국으로 전해져서 중국의 불교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후 200 여 년이 지난 동진(東晋)시대에 이르러서는 인도로부터의 도래승들과 입축구법승(入竺求法僧)들이 늘어 인도와 집적 불경이나 불상을 교류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러므로 중국불교는 인도불교와 서역 불교의 영향을 함께 입으면서 거기에 중국의 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발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 하난성 용문석굴 비로자불

중국불교의 특징은 크게 격의불교(格義佛敎)와 교상판석(敎相判釋) 그리고 선종(禪宗)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불교가 언제 처음 중국에 전래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⓬이설(異說) 이 있습니다. 대략 B.C. 2C - A.D. 1C 사이에 불교가 전래된 중국에서는 불교의 가르침을 노자와 장자의 사상과 같은 성격의 사상으로 이해하였는데, 이를 격의불교라 합니다. 격의(格義)란 타종교에 그 의미를 붙여서 해석하는 것으로 반야, 혹은 공의 진리를 노장사상을 매개로 하여 이해한 것을 말합니다. 이런 격의불교는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한편으로는 중국인들에게 생소한 불교를 이해시키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경전이 번역되기 시작하면서 이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켰고, 이에따라 불교를 올바로 이해하자는 기운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운이 생기게 된 원인은 불교경전의 번역에 있었는데 이미 초기 부터 안세고(安世高), ⓭지루가참(Lokaraksa,支婁迦識)과 같은 역경승들이 있었지만 중국불교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은 바로 구마라집(Kumarajiva, 鳩摩羅什, 344~413)입니다. 나집(羅什)은 74부 384권에 이르는 대승경전과 율장, 논서 등을 번역하였는데, 특히 대승의 논서는 이때 처음으로 전래된 것으로 이에 의해 삼론종, 성실종 등이 홍기(興起)되었습니다. 그의 번역은 정확성과 문장의 미려함, 그리고 번역 자체가 불교를 강술하는 성격을 띠어서 중국불교의 일대 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그의 번역에 의해 중국인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그때까지의 격의불교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의 제자 가운데 중국불교 사상사의 최대 사상가로 평가되고 있는 승조(僧聲, 383~414)는 당시 노장사상의 아류로 잘못 이해되고 있는 공(空)에 대해 새롭게 해석을 가한《조론(筆論)》을 지어 격의불교를 비판했습니다.

구마라집 이후의 경전번역의 가장 큰 성과는 삼장법사 현장(玄莊, 600 ~ 664)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17년에 걸친 구법여행 끝에 인도로부터 범어 경전 657부를 가지고 돌아와 무려 75부 1,335권의 경전을 번역했습니다. 그의 번역은 축어적(逐語的)이고 엄밀했는데, 이를 구마라집의 번역과 비교하여 나집삼장의 번역은 구역(舊譯)이라 하고, 현장삼장의 번역은 신역(新譯)이라 부름니다.

중국불교의 또다른 특징은 교상판석(敎相判)입니다. 인도에서는 근본불교 시대를 거쳐 소승과 대승불교라는 불교의 역사를 거쳐왔습니다. 그러나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인도에서 이미 대승불교가 흥성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경전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대승경전과 소승경전의 구별이 없이 번역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중국인들은 동일한 불교경전 가운데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는 경전들로 인해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승을 비난하는 대승경전이나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는 논서를 두고 과연 이들 경전 가운데 어느 것을 최고의 것으로 중시해야 하는가라는 경전의 우열론이 제기되었고 아울러 교설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정리하고 체계화할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각자 판단의 기준에 따라 부처님의 교설을 통일, 정리하여 이해하려는 경향이 일어나니 이것을 교상판석이라고 하고 줄여서 교판이라고 합니다.

이 선택의 기준에 따라 새로운 종지(宗旨)가 성립되고 이것이 발전하여 각각의 종(宗)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13개 종파가 생겨나니 교판에 따른 종파불교의 형성은 중국불교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종파로는 구마라집의 제자 길장에 의해 확립된 삼론종(三論宗)과 천태지의에 의한 천태종(天台宗), 현장법사의 제자들이 세운 법상종(法相宗), 지엄 (智儀)의 화엄종(華嚴宗) 및 담란의 정토종(淨土宗) 등이 그 교세를 떨쳤습니다.

이런 종파불교 가운데 선종(禪宗)은 가장 중국적인 불교의 성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리달마대사를 개조로 하여 2조 혜가대사, 3조 승찬대사, 4조 도 신대사, 5조 홍인대사로 이어지다가 6조에 와서 남종의 혜능대사와 북종의 신수대사로 갈라지게 되는 선종은 부처님의 깨달음에 직접 대면하려는 직관직각(直觀直覺)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선종은 고도로 심화되고 발달하여 오히려 진리를 드러내지 못한 채 문자에 얽매여 있는 불교현실을 비판하고 참선수행을 통한 부처님의 깨달음으로의 직접적 접근을 취했습니다. 혜능대사는 이를 가리켜 “가르침 외에 별도로 전한 깊은 교의이며 따로 문자(교설)를 세우지 않는다(敎外別傳 不立文字)”고 했습니다. 문자에 의하지 않고 곧바로 진심(眞心)에 계합하기 때문에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하였고,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목표로 했습니다. 혜능대사의 이 주장에 따라 오가칠종(五家七宗)의 남종선(南宗禪)이 확립되어 그 주류를 이루게 된다.⓮ 선종의 성립은 중국불교가 이루어낸 또 하나의 혁명이었습니다. 복잡한 교학연구와 현학적 풍조로 인해 부처님의 참 뜻인 성불의 지향에서 멀어진 풍토를 일거에 혁신하고, 성불을 지향하는 불교, 현학적 불교를 배격하는 새로운 불교를 이루어낸 것입니다. 복잡한 교리의 학습을 거치지 않고도 참선 수행을 통해 부처님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자각은 깨달음의 길을 모든 사람에 게로 열어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선종은 역동적이고 직접적인 불교였습니다. 그러나 선종은 지나치게 출세간적이고 침묵적인 경향으로 흐르게 되어 본래의 적극 적인 성격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Note :
⓬ 불교의 중국 전래에 관해서는 10여가지의 서로 다른 이설(異說)이 있다. 이러한 이설 가운데에서 가장 신빙성 있는 설(說)은, ‘전한(前漢) 애재(哀帝) 원수(元壽) 원년(B.C. 2)에 박사제자(博士弟子)인 태경헌(泰景憲)이 대월씨국(서역지역의 나라)왕의 사신인 이존(伊 1存)으로부터 구수(口授)받았다'고 하는 설이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 이전부터 무역 상인들을 위시한 교통자들에 의해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⓭ 두 사람 모두 서역 사람으로서, B.C. 2C경 중국에 들어와서 많은 경전을 번역했다. 두 사람의 경전 번역은 곧 대·소승불전의 중국전래가 되는 동시에 후세에 큰 쳤으므로 중국불교의 실질적인 시작은 바로 이 두 사람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⓮ 뒤에 이르러 선종은 거의 6조 혜능의 계통에 의해 점유되게 되었지만, 당대에 있어서는 신수의 계통인 북종선(北宗禪)이 혜능 계통의 나서과 함께 크게 성황하여 불교의 대표 적인 수행방법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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