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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교리

붓다의 세계관 ③ 공업(共業)

by 파장波長 2022. 4. 29.

제일원인으로서 공업(共業)

 

우주와 인간 사회의 성립과 구조에 대해서 살펴볼 때 우리는 인간의 주체적 활동으로서의 업(業)에 주목헤야한다. 그곳에서 업은 이미 우주론적 제일원인 (First Cause)의 위상을 지니는 것이다. 그런데 우주론적 전개의 제일원인으로서의 공업(共業)의관념은 몇 가지 생각할 문제 점을 남긴다. 공업이 진정 우주 전개의 초기 단계 때부터 원인으로 작용 하였는지에 대해서 인식을 통한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당시의 종교 사상들을 비판하실 때 항상 인식을 통한 확인을 전제하였다.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바라문 사상가들에게 “과거로부터 바라문 사상가들 중에 누구라도 창조신을 본 자가 있는가?” (南傳 長部 《三明經》)라고 질문하시고 본 자가 없다는 그들의 답변을 들은 뒤 과거에도 확인되지 않았고 지금도 확인되지 않고 앞으로도 살아 있는 몸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그런 창조신은 허구이며 가설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렇다면 중생의 공통된 의지적 활동으로서의 업이 우주 성립의 초기 단계에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을 우리는 실제 눈으로 보았단 말인가. 아니면 하다 못해 그때의 일을 기억이라도 한단 말인가. 우리에게는 그런 의미에서는 확인된 바가 없다. 중생의 업력이 도대체 어떻게 하여 우주 의 초기에 허공에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지를 눈으로 똑똑이 본 자는 아 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생의 공업을 제외한 다른 원리로서 우주 및 인간 역사 전개 의 원인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특별히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부처 님은 분명 "일체의 세간은 중생의 업력에 의하여 나타나고 성립한다.” ⟪起世經⟫고 설하셨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우주의 성립과 전개의 제일원인은 중생의 공업(共業)’ 이라고 하는 주장이 세워지는 필연적인 교리 체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주장의 진실성을 상당히 확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업(共業)이란 업의 일종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업의 가르침을 설하시는 근거로서 앞에서 살폈던 12처설을 제시한다. 그것은 업설의 가장 기본적인 술어인 업(業, karma)이라는 명사가 의지적 작용' 에서 온 말이며, 업의 대응어인 보(報, vipaka)는 필연적 반응' 을 지칭한 말이라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의지적 작용과 필연적 반응은 각각 12처를 이루는 육근과 육경의 특성이기 때문이다.❷

그런데 육근의 작용과 육경의 반응 사이에는 필연성'이 있으므로, 작용을 인(因, hetu)으로 반응을 과(果, phala)로 말할 수 있다. 인과란 필연성을 지니는 두 사건 사이에 붙이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작용인 '업'과 반응인 '보' 사이에 인과 관계가 성립하게 되는데 이것을 우리는 업인과보(業因果報)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업인과보의 법칙은 우리의 사회생활에도 적용된다. 착한 업인에는 즐거운 과보가 따르고(善因善果] 나쁜 업인에는 괴로운 과보가 따름(惡因惡果)을 관찰할 수 있다. 이와 같이 12처의 세계에는 어디나 업인과보의 법칙이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❸ 따라서 우리의 현실을 설명하는 데 가장 믿을 만한 원리 중의 하나로 채택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십이처의 세계에 속속들이 적용될 것 같은 업인과보의 법칙으로도 좀처럼 쉽게 설명되지 않는 문제가 우리 현실에서는 인식된다. 어떤 이는 부유한 가정에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일생을 즐겁게 산다. 그리고 어떤 이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궁핍함을 면치 못하고 어떤 이는 온갖 죄악을 저지르면서도 자신과 그 가족은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사회적 부조리도 있다. 이것은 선인에 선과가 따르고 악인에 악과가 따른 다는 업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뒤흔든다.

나아가 우주의 질서 있는 운행과, 바깥으로의 한없는 팽창과 같은 사건 또한 업으로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과연 중생의 업이 우주를 그렇게 운행하는 동력인이 된다고 볼 수 있을까? 인간 또는 중생은 오히려 물질적 우주가 먼저 형성되고 난 다음에 나타난 존재라고 여겨지기도 하니, 오히려 우주의 성립이 원인이 되고 인간은 그 결과의 위상을 갖는다. 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사회적 부조리와 우주론적인 사건을 두고 다른 종교사상가들은 신이나 운명 또는 우연을 원인으로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들도 인정할 수는 없다. 다음 자리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들은 인간의 죄악과 의지라는 중요한 현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주장의 핵심인 신과 같은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검증 불가능성마저 지니고 있어 결코 진리라고 볼 수 없기 때문 이다.

그리고 그 견해들을 인정하면 그와 반대 성질을 지닌 개인적 자유의지의 존재성은 포기해야 하며, 아울러 자유의지에 바탕을 둔 업보적인 현상도 단념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의지의 존재를 포기할 수 없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 및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분명히 성립하는 업보적 관계도 결코 단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현실의 관찰로부터 그들은 너무나 자명하게 인식되기 때문이다. 검증되지 않은 가설에 불과한 신 등의 원리 때문에 자명한 사실을 포기할 수는 없다. 이렇게 업인과보의 원리를 굳게 지닌다면 사회적 부조리 현상과 우주론적 사건에 대해서도 일단은 업인과보의 현상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위의 상황 중 부유한 가정에 태어나 즐겁게 살아가는 경우는 선인(善因)은 발견되지 않았는데 선과(善果)만 나타난 경우로 분석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적 부조리 현상은 전자의 경우 선인은 있는데 선과가 나타나지 않았고, 후자의 경우 악인은 있는데 악과가 나타나지 않음으로 분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부처님은 우리의 시야를 삼세(二 世)로 확충하라고 말씀하신다. 부유한 가정에 난다는 것은 그 업인이 숙세(宿世)에 있었는데 현세(現世)에 비로소 과보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사회적 부조리 현상 중 전자의 경우는 현세에 지은 선인은 내세(來世)에 선과를 불러들이는 것으로 후자의 경우는 현세에 지은 악인이 내 세에 악과를 불러들이는 것으로 보게 한다. 그러기에 "만일 고의로 업을 지을 때는 반드시 그 보를 받나니 현세에 받을 때도 있고 내세에 받을 때 도 있다.”고 설하신 것이다《中阿含》 제3권〈思經),

사실 업인과보의 삼세윤회설은❹부처님의 일관된 가르침인 무아설과 외형상 충돌하는 듯이 보여 문제다. 그리고 이 생에서 지은 업이 다음 생 에 또는 보다 먼 미래 생에 과보를 불러들이게 되는 구체적인 과정도 문제로 남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것을 요청하는 부처님의 입장과 어긋나 보이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부처님은 십이처 설을 설하시면서 존재하는 것은 인식되어야 하고 인식되는 것만이 존재 한다고 선언하였다. 따라서 전생이란 것도 존재했다고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기억되는 것이어야 하는데, 우리는 전생의 기억이라고 확실히 말할 만한 것을 스스로에게서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 하여 이 교설은 '인식' 될 것을 강조하는 십이처설과는 엇갈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히려 십이처설에 철저히 바탕을 두고 성립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검증되지 않은 가설에 불과한 신 등을 세우기보다는, 현실에서 관찰되는 자명한 사실들을 근거로 하여 업인과보의 삼세윤 회설이라는 필연적 결과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업을 짓고 그 과보를 받으면서 삼세윤회하는 것이 중생 개개의 존재다. 그리고 중생의 수는 거의 헤아릴 수 없다. 아울러 그러한 중생의 업이 아득한 과거 곧 하나의 우주가 성립하는 초기 단계부터 또는 그 이전부터 항상 무수히 있어 왔음을 다시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중생이 살아갈 우주는 육경의 범주에 듦으로 중생들의 의지적 작용에 필연적 반응 을 보이는 것으로 봐야 한다. 특히 중생들의 의지가 모두 한 방향으로 일치하여 작용한다면 그 힘은 강대할 것이며 능히 초기 단계의 우주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부처님은 어느 우주이든 우주가 성립된 직후에는 중생들이 광음천(光音天)이라는 천신으로 존재한다고 설하셨는데, 이 말씀은 우주 성립 이전에 존재하며 우주를 성립시키는 중생들의 위치는 광음천보다 한 단계 앞인 변정천(遍淨天)으로 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변정천 중생의 특징을 “몸도 같고 생각도 한가지인 중생들이다.”(南傳 長 《大原因經≫)라고 규정하시거니와 그 중생들의 의지적 작용이 한가지 방향으로 기울어질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우주 성립의 최초 단 계에서부터 동일한 방향의 업인 '공업'을 일으켰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바로 그 "업력에 의해 세간이 일어나 성립했다.”(《起世 經≫)고 부처님은 설명하고 있다.

결국 우주론적 제일원인으로서의 공업은 업인과보의 삼세윤회설을 바탕에 둘 때 필연적으로 성립하는 원리인 셈이다. 그리고 업인과보의 삼세윤회설은 십이처의 세계에 대한 타당한 성찰에 의해 또한 필연적으로 전개된 교설이다. 나아가 십이처설은 이 우주를 이해하는 가장 간단하면 서도 결점이 없는 분류법이다. 따라서 부처님에 의한 공업의 가르침은 우주론적 제일원인에 대한 규명으로서 손색이 없다고 할 것이다.


Note :
❶ 공업(共業)이란, 제각기 공동으로 선악의 업을 짓고, 각자가 공동으로 고락 (苦樂)의 과보를 받는 것 
❷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이란,  육근은 우리 몸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마음(意)이고, 육경(六境)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대응하는 감각대상,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 (法)이다. 육근의(六根) 작용으로 육경(六境)의 반응이 일어난다. 이것을 인과(因果)라고 한다.


❸ 십이처[十二處, Sip-icheo] : 십이입(十二入) 또는 십이문 (十二門)이라고도 한다. 안이비설신의 (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 감각 기관과, 그것들에 반응의 대상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육경(六境), 이들을 합하여 십이처(十二處)라고 한다. 이들의 접촉에서 온갖 정신작용과 번뇌가 일어난다.
❹ 삼세윤회 (三世輪廻)란,  과거의 원인에 의하여 현재의 과보 (果報)를 받고, 현재의 원인에 의하여 미래의 과보를 받는다는 것이며, 숙세(宿世)의 악업에 의한 현세의 고통도, 선업(善業)을 쌓으면 내세에 좋은 과보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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