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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교리

산중 조선시대 불교

by 파장波長 2022. 5. 3.

조선 건국에 밑거름이 되었던 신진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정신적 지주로 내세우면서 불교는 중앙에서 배제되어 점차 산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조선조의 불교는 산중 승단을 중심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는데, 이를 시기에 따라 대개 셋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모악산 금산사도, 허련 許鍊, 조선 19세

제1기는 양종(兩宗)과 승과(科) 존립기는, 개국(1392)에서 명종 20년(1565)까지의 기간으로, 국초의 11종(宗)이 태종 때에 7종으로 되고 다시 세종때 선교(禪敎) 양종으로 통폐합된 시기입니다. 그러나 고려 때부터의 승과를, 일시적인 중단이 있었지만 그대로 유지해 온 것이 이 시기의 특징입니다.

제2기는 산승가풍 확립기는, 명종 21년으로부터 서산대사 휴정(1520~1604)의 가풍 확립과 그 문하 및 법손들에 의하여 문풍이 크게 충성하였던 시기입니다. 이때는 선종, 교종이라는 이름마저 박탈당하여 종명(宗名)도 종파(宗派)도 없이 서산대사를 중심으로 법맥을 이어온 본격적인 산승불교 시대입니다.

제3기는 삼문수업(三門修業) 존속기는, 가풍 확립 및 흥성기에 이어서 조선 말까지입니다. 이 시기에는 간경, 참선, 염불의 삼문수업 전통이 확립되어 계승되며, 승가 안에는 이를 공부하는 이판승(理判僧)과 절의 일을 맡아보는 사판승(事判僧)이 있어서 각각 불법 계승과 가람 수호 및 사원재정 확보에 충실하여 계속되는 배불(排佛)의 역경 속에서도 산중 승단을 잘 지속시켰습니다.

조선왕실은 외유내불(外儒內佛)적 경향이 강했습니다. 즉 바깥으로는 유교를 표방하면서 왕비나 종친 등 왕실측 인물들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태조 이성계도 신진관료들의 생각과는 달리, 무학 자초(1327~1405)를 왕사로 삼고 조구(祖丘)를 국사로 삼았으며 탑과 절을 건립하는 등 많은 불사를 행했습니다.

태종과 세종대에는 본격적인 배불정책 단행했으나, 세종도 말년에는 불교를 신앙하여 한글 창제 이후 둘째 아들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우리 나라 최초의 한글 불서인 『석보상절」❶을 짓게 했으며 『월인천강지곡」❷을 친히 짓기도 했습니다.  제7대 세조는 조선조의 대표적인 흥불왕이었습니다. 그는 '불교는 유교보다 나으며 그 차이가 하늘과 땅과 같다'고 하며 즉위하자마자 적극적인 흥불정책을 폈습니다. 세조는 삼보를 받들어 승려의 권익을 옹호하며 사원의 중흥 불사를 크게 일으키고, 불전을 국역하여 간행하고 대장경을 인출(印出)하며, 불교 음악을 비롯한 불교 문화사업도 크게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성종, 연산, 중종조를 거치면서 불교는 다시 극심한 탄압을 받아 승과(僧科)마저 합법적으로 폐지되어 선종과 교종의 종단까지도 존재 의미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 후 13대 명종의 즉위로 섭정하게 된 문정왕후와 그를 도왔던 보우대사의 흥불로 선교양종과 승과가 다시 부활했습니다. 이에 교단은 다시 활기를 띠고 유능한 인물들이 모여들었으니, 서산대사나 사명대사도 이때의 승과 출신 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정대비가 별세하자 이듬해(명종 21)에 기어이 양종의 승과가 폐지되고 도승법도 금지당했으며 보우대사는 요승이라는 악명을 쓰고 장살(杖殺) 당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불교계는 더 이상 일어설 힘을 잃고 산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려불교가 선교대립의 지양이라는 과제를 안고 선교겸수에 주력했던 것에 이어 조선불교는 유불대립(儒佛代立)이라는 새로운 문제의 등장으로 유불선 삼교의 회통까지도 행했습니다. 나옹 혜근과 무학 자초로 전해지는 법맥을 이은 함허당 득통선사 기화(1376~1433)는 유교측의 척불론에 대하여 《현정론》을 저술하여 불교의 바른 뜻을 천명했으며, 나아가 유불도(儒佛道) 삼교가 근본에 있어서 다르지 않음을 강조했습니다. 기화는 임제종풍을 주축으로 했으나 선가의 여러 사상을 두루 수용했으며 아울러 여러 저술을 통하여 교(敎)를 선적(的)으로 해석함으로써 선교융회 를 꾀했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그 뒤 설잠 김시습(1435~1493)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조선 전기 불교사상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승단이 산중으로 들어가게 된 시기에 이르러서는 법통의 수호와 전승이 교단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날로 더해가는 배불정책하에 언제 법맥이 끊어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산중에 가득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태고법통설(太古法統說)이 등장합니다. 서산대사 청허 휴정이 선조(宣祖)에게 그 인품을 인정받고 선조 25년(1592)의 임진왜란 때에는 그의 지휘 아래 제자들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일어난 승병의 지대한 활약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휴정의 활약은 척불의 시기에 불교가 국난 극복에 주축이 되어 그 의로움을 공인 받았으며, 승단 내부로는 다시금 결속을 다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태고법통설은 이와 맥락을 같이하여 청허 휴정의 법통이 석옥 청공 → 태고 보우 → 환암 혼수 → 구곡 각운 → 벽계 정심 → 벽송 지엄 → 부용 영관 → 청허 휴정으로 전승되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어서 휴정 문하의 1천여 제자 가운데 유정(政) · 언기(彦機) · 태능(太能) · 일선(一禪)의 네 사람이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오늘날의 한국 승단은 거의가 휴정의 후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큰 것이었습니다.

벽송 지엄(1464~1534)은 후학을 지도함에 먼저 《도서(都序)》❸와 《절요(節要)》❹로 올바른 지견을 세우게 하고《선요(禪要)》❺와 《서장 (書狀)》❻으로 알음알이의 병을 제거하여 활로를 제시해 주었습니다. 이 네 가지 선의 입문서는 사집(四集)이라 하여 지금까지도 강원의 기초 과정에서 교육되고 있습니다. 그의 교육이념은 “고요히 조사선을 참구하고 한가히 제불의 가르침을 보며, 여가가 날 적에는 아미타를 생각하여 정토에 나기를 구하라.”고 한 말에서 잘 나타납니다. 이와 같이 선과 교를 회통하고 정토를 아우르는 삼문수업(三門修業)의 전통은 조선불교 이후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습니다. 지엄의 법풍은 부용 영관을 거쳐 청허 휴정에 이르러 굳건히 다져집니다. 이어서 휴정 문하의 영월 청학에게서 제정된 강원교육 과정도 이러한 선교겸수, 원융수행의 이념아래 배정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력 과목에서는 한 사람이 반드시 선교양종의 서를 겸수하였으니, 그것이 곧 사집, 사교, 대교 등의 과목입니다. 즉 강원교육에서도 선교 를 겸수하게 하여 선교를 총섭하고 겸판할 수 있는 종사의 인재를 양성 하는데 그 목표를 두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학풍은 벽송 지엄 이후 오늘날 까지 계승되고 있습니다.


Note :
❶석보상절(釋譜詳節) : 세종 29년 (1447)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세종의 명에 의하여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존(世尊)의 팔상성도(八相成道)하신 것을 뽑아 만들어 왕에게 올린 것
❷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세종 29년 (1447)에 왕명에 따라 수양대군 首陽大君)이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보상절(釋譜詳節)을지어 올리자, 세종이 석가(釋迦)의 공덕을 칭송하여 지은 노래. 이 책은 세종 31년 (1449)에 상・중・하 세권으로 간행됨
❸도서(都序) :  중국 규봉(圭峯)대사가 불교의 교리를 개론한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銓集都序)를 말한다. 불문(佛門)에서 배우는 사집과(四集科)의 하나.
❹절요(節要) : 보조 지눌(普照 知訥)이 저술한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並入私記)의 약칭. 규봉 (圭峰)과 하택 (荷澤) 등의 주장을 인용 비판하여 정혜쌍수(定慧雙修)를 말한 책으로, 한국 강원의 사집과 (四集科) 교재중의 하나.
❺선요(禪要) : 고봉 원묘(高峰 原妙) 지음. 선법 (禪法)의 요의(要義)를 적은 책. 우리나라 사집과(四集科) 의 하나
❻서장(書狀) :  대혜선사(大慧禪師) 종고(宗杲, 1088-1163)의 편지를 모은 두 권의 책으로 한국 강원의 기본 교재중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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