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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교리

선교겸수(禪敎兼修)의 고려불교

by 파장波長 2022. 5. 3.

태조가 고려를 세우는 데에는 불교의 도움이 컸습니다. 우선 지방호족을 중심으로 일어난 구산선문이 그 세력기반을 같이했습니다. 당시 전래된 선문 가운데서도 특히 편(5)과 정(), 군()과 신()이 조화를 이룬 경지를 선의 극치로 설명하는 조동종은 후삼국의 통일을 도모하는 그에게 관심을 끄는 것이었습니다. 또 도선(, 809~898)의 비보사탑설(神補寺塔 )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즉 나라의 흉처를 사탑으로 비보하여 사원의 군사적, 경제적 실용성을 높이고자 한 것으로 선의 실용성을 음양오행사상과 교묘하게 결합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교()로서는 북악파 화엄학의 거장 해인사 희랑의 도움이 컸습니다. 이와 같이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선과  교를 아우르고 거기에 도참의 요소가 가미된 불교가 전개되기 시작했습니다.

고려시대 대장경판

광종(950~975) 대에는 중앙집권적 전제왕권체제를 다지면서, 불교로서는 천태학의 연구가 활발하였으며 법안종이 전래되었습니다. 제관(諦觀)은 광종 11년에 천태종의 전적을 가지고 오월(吳越)에 들어가 그곳의 천태 교관을 다시금 일으키고 천태개론서인《천태사교의》를 저술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중국으로 들어가 나계 의적의 제자가 된 보운존자 의통(義通, 927~988)은 천태교관을 대성하고 중국 천태종의 제16조가 되어 송의 천태종을 부흥시켰습니다.

이렇게 당시 고려의 천태학은 중국에 다시 전수할 정도로 상당한 수준을 갖추었던 것입니다. 선종 가운데서 법안종은 천태학과 정토사상을 융합한 특징을 지니는데 이때에 법안종의 선풍을 적극 받아들인 것은 자연스런 흐름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시기에 해동화엄의 중요한 인물로 균여(, 923~993)가 있습니다. 그는 북악의 성기사상(性起思想)❶을 중심으로 남북악으로 갈라진 화엄교단을 통일했습니다. 그는 화엄의 저술에 힘썼을 뿐 아니라 보현행을 강조한 실천가로서 '보현십종원왕가' 라는 향가 11수를 지어 실천적인 화엄의 보살행을 민중속에 정착시키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신라 말 불교의 현학적인 분위기에서 일어난 교단 분열을 실천적 보살행으로 지양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고려의 천태종을 개창하기 이전 화엄에 뜻을 두었던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은 균여의 실천적 화엄에 대하여 교()와 관()을 겸수하지 못하였다고 맹렬하게 비판하며 화엄 전적을 모은《원종문류》 22권을 저술했습니다. 그는 화엄과 선문(禪門)으로 대립된 당시의 불교계를 교관균등(敎觀均等)의 천태로써 통일시키고자 마침내 고려에 천태종들 개창하게 됩니다. 이때 선문의 승려로서 열 사람 중 예닐곱이 천태종으 향해으며, 의천의 제자 가운데는 화엄 계통의 승려가 부지기수임을 보면 당시의 천태종의 기세를 짐작할 만합니다. 

12, 13세기에 고려는 밖으로는 여섯 차례에 걸쳐 몽고의 침입을 받고 안으로는 최씨 무신정권 시대로 접어들면서 무신란과 민란이 계속되어 내우외환이 겹쳤습니다. 이에 외침을 극복하려는 불사(佛事)가 무수히 봉행되고, 내란에 승려들이 대거 가담하여 승단의 타락상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이즈음에 교단에서는 불교 본연의 자세를 가다듬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니, 선종의 보조 지눌(1158~1210)의 정혜결사(定慧結社)와 천태종의 원묘 요세(1163~1245)의 백련결사(白蓮結社)❷가 그것입니다.

지눌은 송광산 수선사(修禪社)를 중심으로 정혜쌍수(定慧雙修)에 힘쓸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당시의 선교문제를 깊이 의식하여 치선(癡禪)과 건혜(乾慧)❸를 모두 바로잡고자, 자기의 무명분별심이 곧 제불의 보광명지임을 알아 자성에 의지하여 선을 닦으라는 돈오점수의❹선교일치(禪敎 一致)를 천명했습니다. 이 돈오점수설은 선의 계통 상으로도 당시의 구산선문❺에서는 이단시하는 하택 신회의 공적지(空寂智)와 중국 화엄종의 방계인 이통현 장자의 화엄성기 사상 및 청량과 규봉의 교선일치 사상을 흡수한 것이기도 합니다. 당시 교단의 선교대립을 의천이 천태종의 교관겸수로써 통일하려 했다면, 지눌은 기존의 선과 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면서 선종의 입장에서 정혜쌍수로서 선교일치를 주창했던 것입니다.

이에 반해 원묘 요세의 백련결사는 어지러운 세태에 대한 치열한 자각으로 모여든 승속(僧俗)의 대중이 만덕산 백련사(白蓮社)를 중심으로 일으킨 전통적인 천태의 법화결사입니다. 이 백련결사는 보현도량을 열어《법화경》을 독송하고 선정을 닦으며 준제주(准提呪) 일천 편과 미타 명호 일만 성호를 외는 것을 내용으로 했습니다. 아울러 요세는 천태삼대부의 절요를 판에 새겨 내어놓아 방대한 천태교학의 핵심을 후학들에게 전했습니다. 지눌의 결사에 비하여 요세의 백련결사는 선교일치의 교관겸수뿐 아니라 현밀원통(密圓通)과 선정겸수(禪淨兼修)라는 그야말로 통불교적 면모를 갖추었던 것입니다. 의천이 개경을 무대로 교장(敎藏) 중심의 천태종을 세웠다면, 요세는 지방 세력을 중심으로 실천적 천태종의 전통, 나아가 통불교의 전통을 수립했던 것입니다.

고려 후기에는 위의 주요한 두 결사가 교계를 이끌었을 뿐 아니라 민족의 전통성을 되살리려는 노력도 잇달았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균여 화엄학의 부활입니다. 고려의 재조장경(再造藏經, 1251년 완성)에는 의천이 배척했던 균여의 화엄 저술이 대량 수록되었는데, 이는 신라 의상의 화엄을 계승한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화엄학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보각국사 일연(1206~1289)의 『삼국유사』는 우리 민족의 무교적 신성관념이 불교의 제석신앙에 섭화되었음을 보여주며 나아가 한민족의 정신적 원천이 멀리 단군신화에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시대를 주도했던 불교인으로서 민족 전통성에 대한 역사의식을 반영한 결정체라 고 할 것입니다.

1세기에 걸친 원()의 지배하에 교단을 쇄신하고 구산문의 사상적 통일을 이루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태고 보우, 나옹 혜근 등이 원에 들어가 임제선을 들여 왔습니다. 임제종은 5가 7종 가운데서 가장 활발한 선기(禪機)를 자랑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선풍으로 당시의 타락한 불교를 일신해 보려한 것입니다. 그러나 고려말 사회는 부분적 개혁만으로는 회복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마침내 고려 말엽부터 전래된 유교의 성리학이 조선 조의 정치이념으로 채택되면서 불교는 민족 정신의 구심점으로서의 자리 를 잃어가게 됩니다.


Note :
❶화엄의 성기(性起)사상는 '모든 존재는 여래의 성품이 발현한 것이라고 파악한다.' 라는 《대방광불화엄경》 경의 제목을 해석함으로써 알 수 있다. 《대방광불화엄경》이란 크고 반듯하고 넓은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보살의 만행이라는 갖가지 꽃으로 장엄하는 내용을 설한 경전. 이때 부처님은 삼신(三身)이 원융한 비로자나불로서 우주 모든 존재에 그 빛을 두루 밝게 비추는 분. 동시에 모든 존재는 비로자나불의 현현 아님이 없으니 그것을 여래출현(如來出現) 또는 여래성연기(如來性緣起) 혹은 줄여서 성기(性起)라고 한다.
❷백련결사는 정토왕생을 위한 염불수행을 도모하기 위하여 조직된 신행결사로. 백련결사가 최초로 일어난 것은 중국 동진(東晉) 때의 고승 혜원(慧遠)이 동림사(東林寺)에서 염불왕생을 결사하고 백련사라 함으로써 비롯되었다.이 백련결사는 지눌(知訥)의 정혜결사(定慧結社) 못지않게 성황을 이루었는데, 요세 당시에 득도(得度)한 제자가 38인, 백련사에 참여한 사찰이 5개 소, 결사에 직접 참여한 인원이 3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 백련결사에서는 참회하여 죄를 멸하는 참회멸죄(懺悔滅罪)와 정토에 태어날 것을 바라는 정토구생(淨土求生)에 전념하였다. 백련사의 제1세인 요세는 원묘국사(圓妙國師)가 되었으며, 백련사의 법통은 제2세 정명국사(靜明國師), 제4세 진정국사(眞靜國師) 등, 제11세 무외국통(無畏國統)에 이르기까지 전승되었다. 모두가 국사 또는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은 것으로 보아 그 교세가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가 있다.
❸건혜(乾慧)는, 마른 지혜. 비록 깨쳐서 지혜를 얻었다 하더라도, 선정 (禪定)의 힘이 충실하지 못하면 그것을 마른 지혜라고 함. 다시 말해 마른 지혜는 죽고 나는 이치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나고 죽음에 있어서 자유자재 하지 못하다는 것
❹돈오점수(頓悟漸修)란, 문득 깨달은 다음 점차 닦아 나아감. 다음은 혜능선사 (慧能禪師)의 말: ‘법 (法) 돈 (頓)과 점 (漸)이 없건만 (근기에 따른) 미혹함과 깨우침에 따라 더디고 빠름이 있느니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를 두고 서로 다투는지? 깨친 사람답지 않게. 정말 깨쳤다면. 하나만을 고집하는 사람은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❺구산선문(九山禪門)이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불교가 한창 융성할 때, 큰 스님들이 중국에 가서 달마 선법 (禪法)을 받아 가지고 돌아와, 신라 땅에 9곳의 선종사찰을 세워 종풍 (宗風)을 크게 드날린 것을 가리켜 구산문 (九山門)이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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