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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교리

통일신라의 교학불교와 선법(禪法)

by 파장波長 2022. 5. 4.

신라는 30대 문무왕대(661~681)에 삼국통일의 과업을 완수했습니다. 그 이후 36대 혜공왕대 (765~780)까지는 불교의 교학연구나 실천교화 등 불교의 모든 면에서 전성기를 이루어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웠습니다. 이어 38대 선덕왕대부터 망국(935)에 이르기까지는 교학불교가 쇠퇴하는 시기이며 동시에 선법(禪法)이 전래되어 전국 각지에 선문(禪門)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통일 신라의 불교문화재를 대표하는 석굴암은 751년 신라 경덕왕때에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해서 774년 혜공왕때 완성하였으며 통일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의 걸작으로 건축,수리,기하학,종교,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석굴암의 석굴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삼국의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는 신라불교의 동향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인도불교의 흐름 가운데 공(중관)과 유(유식)의 대립이라는 큰 맥은 중국에 와서 삼론종과 법상종으로 전개되었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고구려의 삼론학과 신라의 유식학이 성행하여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삼국의 민심을 원만하게 포용해야 하는 신라로서는 불학에 있어서도 중관과 유식의 대립, 소승과 대승의 대립을 모두 하나의 맛과 하나의 방편으로 회통해야할 필요성을 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에 큰 업적을 남긴 대표적인 이가 원효와 의상입니다. 

원효(617~686)는 한 마디로 일심(一心)을 사상의 축으로 하고 화쟁회통(和舒會通)❶을 그 방법론으로 하여 무애(無碍)의 실천행을 보인 분입니다. 그의 일심은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깨끗함과 더러움, 있음과 없음 등 모든 대립의 본래 성품인 일심이며, 화쟁회통이란《법화경》에서 삼승을 모아 일불승으로 돌아가는[會三歸一] 회통이며 뭇 흐름을 모아 한맛으로 돌아가게 하는 열반경의 종지입니다. 무애는, 원효가 계율을 저버리고 설총을 낳은 뒤 탈바가지 모습을 따라 박을 만들어서, "일체에 걸림없는 사람이 한길로 삶과 죽음을 벗어났으니[一切無碍人一道出生死] 라는 화엄경의 게송 구절을 따라 ‘무애박' 이라 이름하여 두드리며 행한 걸림없는 교화의 모습입니다. 원효는 이와 같이 어느 한 경전이나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대승의 모든 경전과 사상을 회통하여 원융한 한맛을 드러냈으니, 우리 나라 통불교(通佛敎) 전통을 연 효시(嚆矢)입니다. 그의 거침없는 경론 해석과 높은 덕행은 바다 건너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쳐 당나라에서는 그의 ‘소(疏)'를 해동소라 하고《금강삼매경론소》를 ‘론'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의상(625~702)은 함께 당나라로 유학하려다 중도에 깨달음이 있어 되돌아온 원효와는 달리, 중국에 들어가 지엄(602~668) 문하에서 화엄 교학의 진수를 전수하고 돌아와 해동화엄의 초조가 됩니다. 그의 영향으로 신라에는 화엄교학이 교단적 발전을 이루고 화엄십찰(華嚴十刹)이 대를 이어 세워졌습니다. 특히 30구 210자로 화엄사상의 진수를 요약한 그의《화엄일승법계도》는 스승인 지엄도 눈물을 머금고 감격할 정도였다는 뛰어난 작품입니다. “법성원융무이상” 으로부터 “구래부동명위불” 로 마무리되는 이 법계도는 모든 존재가 여래 성품의 현현이며 본래 부처라는 화엄 사상과 초발심에 곧 정각을 이룬다는 화엄수행자의 구도과정을 문구를 넘어서 도상(圖上)으로 표현해 낸 걸작입니다. 의상은 화엄사상에 기반하여 구체적인 대중교화의 수단으로 관음과 미타의 정토신앙을 아울렀습니다. 우주 법계에 두루한 비로자나불의 화엄정토가 곧 관음의 백화도량이자 서방정토를 체성으로 하는 미타의 극락정토이며, 또 그것은 다름 아닌 부처님이 상주하는 나라인 신라 땅, 바로 그곳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현세적인 정토신앙은 통일 신라불교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미타불의 원력으로 사후에 서방 극락정토에 왕생한다는 내세적 성격이 강한 미타 신앙이 신라에서는 선인선과(善因善果)의 현실성이 강한 현실위주적 성격을 띠었습니다. 미타수행자였던 달달박박은 왕생(往生)이 아닌 성불(成佛)을 하였으니, 이미 서방정토로 갈 필요가 없이 이 땅에서 부처가 되었고 이 땅이 곧 정토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라 정토신앙의 예는 『삼국유사』에 많이 보입니다. 오랜 전란에 시달린 신라인들은 죽음의 공포를 덜어줄 내세적 정토신앙뿐 아니라 물심양면의 현세고통을 구해줄 현실이익적 정토신앙에 대한 요구가 절실했던 것입니다. 원효는 정토경전의 소를 지었을 뿐 아니라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나무아미타불 염하기를 퍼뜨려 거지나 더벅머리 아이들까지도 이를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학승들이 찬술을 통하여 정토교의를 선양하여 신라의 각계 각층에 정토신앙이 전파되었습니다.

한편 통일 이전에 성하였던 유식학에 대한 연구도 여전히 국가적 비호 를 받으며 발전했습니다. 중국으로 건너가 중관과 유식을 중도적 입장에서 통일하고 구유식과 신유식을 비판적으로 종합하여 일미(一味)와 일승(一乘)의 불학체계를 정립한 문아 원측(文雅 圓測, 613~696)은 유식에 있어서 큰 획을 그은 인물입니다. 그러나 귀국하지 못하고 결국 중국에서 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그의 법을 이은 도증(道證) · 승장(勝莊)이 귀국하여 신라의 유식학을 발전시켰으며 다시 그 맥은 태현(太賢)에게 계승되었습니다. 미륵을 주존(主尊)으로 하는 유가유식은 미륵의 용화세계를 구현하려 했던 초전기 신라의 국가불교에 부합하여 유식 계통의 많은 승려가 배출되었습니다. 이들 유가학자들은 유식뿐 아니라 여래장이나 계율 · 정토 · 밀교 등 각 방면에 걸쳐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쳤으며, 실제 신행에서도 불교의 각 분야가 녹아든 통불교적 신앙형태를 보여주었습니다.

신라불교의 대중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밀교입니다.❷ 인도에서도 민간 신앙과 융화하여 후대에 발생한 비밀불교는 삼국의 불교수용 초기에서도 기존의 무속신앙과 충돌을 완화하는 기능을 했습니다.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무속의 의례는 밀교의 의식으로 대체되어 안정된 형식을 갖추었으며 또한 불교 내부에도 우리 민족의 무속신앙적 요소가 습합되었습니다. 신라 초기 밀교는 명랑(明朗, 문무왕대)과 혜통(惠通, 효소왕대)의 두 계통이 있었습니다. 

명랑은《관정경》에 입각하여 밀교의례를 조직하였으며 문두루(文頭婁) 호국법회를 시설했습니다. 그는 유가에 밝은 승려 12인으로 문두루 비법을 지어 당나라 군사를 물리쳤으니, 문두루 법회는 주술의례에 유가사상이 곁들여진 호국적 성격의 의례였습니다. 그의 법은 고려 초에 이르러 신인종(神人宗)을 세우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혜통은 질병이나 재앙을 원한에 기인한 것으로 보고 이를 풀어 주어야 한다는 해원주술(解怨呪術)적 밀교를 행하고, 여기에 수계(授戒)나 창사(創寺)의 법을 접목시켰습니다. 

이것은 당시 민간신앙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계속해서 효성왕대(737~ 741)에서 애장왕대 (800~808)에 걸쳐 중국에서 선무외나 금강지, 불공 삼장 등에 의한 새로운 밀교인 순밀이 전래 되었습니다. 비로자나불을 주존불로 하는 밀교는 화엄사상과 기반을 함께 하면서도 대일여래의 삼밀가지(三密加時)라는 중생교화의 뚜렷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대중교화의 방편이 부족한 화엄의 단점을 보충하고 초기의 잡밀에 비하여 보다 높은 철학성을 부여하였으므로 신라 중기의 불교계에 급속히 전파 되었습니다. 순밀은 혜통의 계통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여러 사상과 폭넓은 교섭을 하다가 융성 발전하여 총지종(摠持宗)을 이루게 됩니다. 이와 같이 밀교는 민간신앙과 융화하며 여러 가지 불교사상과 어 우러져 각계 각층의 불교대중을 하나로 모아내는 그릇의 역할을 했습니다.

융화적이고 독창적인 민족종교로서 찬란하게 꽃피운 신라불교도 통일 후기에 접어들면서 침체하기 시작합니다. 8세기 후반부터 신라에는 호족세력이 성장하여 중앙집권체제를 분해하는 등 정치, 사회적으로 쇠망의 조짐이 나타났습니다. 불교계도 화엄을 중심으로 한 교학불교가 지나치게 현학 적으로 흐르고 각종 공양을 베푸는 의례가 난무하는 사제(司祭)적 분위 기로 흐르자 중국 유학승들이 전해온 선불교(禪佛敎)로 불교의 근본정신 을 되살리려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이 선사들은 대부분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을 근거지로 산문을 개창하여 교화를 폈는데 이것은 주로 도성을 중심으로 전개된 교학불교와는 대조를 이루는 것입니다. 신라 에 가장 먼저 선법을 전한 이는 중국 선종 4조 도신에게서 선법을 배워 온 법랑(法朗)입니다. 그러나 선이 신라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고 영향을 주 게 된 것은 41대 헌덕왕 때 도의(道義)와 42대 흥덕왕 때 홍척(洪)이 혜능 계통 남종선(南宗禪)의 홍주종(洪州宗, 馬祖禪)을 전하고부터입니다. 이들은 귀국 후 각각 산문(山門)을 개창하여 선법을 정착시켰는데 고려 초까지 모두 아홉 개의 산문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를 구산선문(九山禪門)이 합니다. 산문의 명칭과 위치, 개산조(開山祖)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가지산 : 전남 장흥 보림사, 도의(道義) 
② 실상산 : 전북 남원 실상사, 홍척(洪) 
③ 동리산 : 전남 곡성 태안사, 혜철(惠哲, 慧徹) 
④ 봉림산: 경남 창원 봉림사, 현욱(玄墓)

⑤ 사자산 : 강원도 영월 사자산 사, 도윤(道允) 
⑥ 성주산 : 충남 보령 성주사, 무염(無染) 
⑦ 사굴산 : 강원도 강릉 굴산사, 범일(梵日) 
⑧ 수미산 : 황해 해주 광조사, 이엄(利 嚴) 
⑨ 희양산 : 경북 문경 봉암사, 도헌(道憲) 

구산선문의 특징은 여덟 산문의 개산조가 모두 홍주종의 마조 도일 선풍을 전해 왔으며 수미산의 이엄만 석두 희천계에서 갈라져 나온 조동종을 전해 왔다는 점입니다. 아울러 이들 개산조는 모두 입당 전에 화엄교학을 공부하였으며 중국에서 처음 선법을 접했습니다. 이와 같이 화엄을 익힌 그들로서는 선종 가운데서도 화엄과 근본 원리를 같이하지만 깨달음을 추구하는 방법은 화엄과 크게 다른 홍주종의 사상이 관심을 끌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 하대의 선(禪)은 이렇게 화엄교학과 완전히 배치되지는 않되 교학의 치우친 경향을 견제하는 세력으로서 교학불교와 공존하게 됩니다.


Note :
❶화쟁회통(和舒會通)이란, 다툼을 멈춘 다음 화해와 함께 서로 사이좋게 통래 (通來)하는 것
❷밀교(密敎)는 비밀불교로, 그 뜻이 깊고 어려워 말과 글로는 헤아릴 수 없는 비밀스러운 가르침이라는 뜻. 불교 유파 (流派) 중의 하나. 8세기에 중국에 전래되었으나, 당 (唐)나라 말기 이후에는 점점 쇠퇴함. 그러나 같은 시기에 티벳트에 들어온 밀교는 라마교로 변신하여 현재에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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