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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교리

삼국시대 불교 구법과 전법

by 파장波長 2022. 5. 4.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에  불교가 전래되고, 민중속에 어느 정도 정착되면서부터 삼국에는 불교 교학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삼국의 승려들은 중국이나 인도에 가서 법을 구해 올뿐 아니라, 다시 중국의 불학을 발전시키는데 기여하고 나아가 일본에 불법과 불교문화를 전해 주기도 했습니다.

국 승려로서 중국불교에 가르침을 준 최초의 인물로 기록되는 분은 고구려의 승랑(僧郎)입니다. 그는 요동에서 태어나 장수왕대(413~491) 후기에 중국으로 가서 승조(僧筆, 383~414) 계통의 삼론학(三論學)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처음에 북조에서 공부하다가 제말(齊末) 양초(梁初)에 남조로 내려가 삼론학을 가르치니, 그의 명성을 들은 양무제는 우수한 학승 10명을 뽑아 승랑에게 수학하게 했습니다. 그중 승전(僧詮)이 뛰어나서 그의 법을 이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승랑의 가장 큰 업적은 신삼론종(新三論宗)❶의 터전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때까지 중국에서는 삼론과 성실론이 함께 연구되어 학문적인 분리가 없었던 것을 그가 비로소 학적으로 조직하여 삼론학을 확립함으로써 삼론이 성실론과 완전히 분리되어 후에 신삼론종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 외에도 인법사(印法師)나 실법사(實 法師) 같은 분은 수(隋) 나라에 들어가 삼론을 강의하여 당대(唐代)의 유명한 승려들을 제자로 배출했습니다. 또 혜관(惠灌)은 수(隋)의 길장(吉藏, 549~623)에게서 삼론을 배우고 돌아와 일본에 건너가서(625) 삼론학을 널리 펼쳐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고구려의 삼론학은 중국이나 일본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그 밖에 천태나 열반학 등에 대한 연구도 성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 서산 마애여래삼존상 백제 7세기

백제불교의 특징으로는 율학(律學)을 들 수 있습니다. 백제 율종의❷ 비조가 된 겸익(謙益)은 인도로 건너가 중인도의 상가나대율사(常伽那大律詩)에 이르러 5년 동안 산스크리트 어를 배우고 율부를 깊이 전공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성왕 4년(526)에 범본 아비담장과 5부 율문을 가지고 귀국하여, 율부 72권을 번역했습니다. 이에 담욱(黨旭)과 혜인(惠仁) 두 법사가 율소(律 疏) 36권을 저술하고, 왕은 비담과 신율(律)의 서문을 지었습니다. 겸익이 번역한 5부 72권의 율문과 율소 36권을 '신율'이라 이름하여 비로소 백제의 율전(律典)이 완성되었으니 여기에서 백제불교의 독창성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백제의 율법은 법왕 즉위년(599)에는 전국적으로 살생을 금하게 하고 사냥도구를 모두 불태울 정도로 숭상되었으니 백제인들의 진지한 믿음을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중국에 구법한 백제 승려도 많았겠으나 그 행적이 전해지는 분으로는 현광(玄光)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진(陳)의 남악 혜사(514~577)에게서 《법화경》의 안락행(安樂行)❸ 법문을 은밀히 전수 반고 수행하여 법화 삼매를 증득하였으니, 천태 지의와 동문인 셈입니다. 스승은 그의 증득을 인가하고 본국으로 돌아가 선방편으로 많은 사람을 제도하라'라고 했습니다. 그는 귀국길에 바다에서 천제(天帝)의 부름으로 용궁에 들어가 교법을 설하고는 고향인 태주(州) 옹산(翁山)으로 돌아와 절을 세우고 크게 교화했습니다. 그에게는 중국 선사 혜민을 비롯한 많은 제자가 있었으며, 남악 혜사의 영당(影堂) 안에 28인도(人圖)와 천태산 국청사 조사당에 그의 진영이 모셔졌다고 하니 그 덕을 가히 짐작할 만합니다. 현광은 귀국 후 백제에 《법화경》의 가르침을 폈으며 <안락행 품>을 중심으로 한 실천적 법화신앙을 널리 전했습니다.

백제불교의 중요한 점으로 선진 불교문화를 일본에 처음 전해준 사실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최근 일본 학계의 설로는 성왕 16년(538)에 백제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수서(隋書)에 따르면, 일본에는 일찍이 문자가 없었는데 백제로부터 불교 경전을 받아들여 불법을 공경하고 비로소 문자가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에 문자를 전한 이를 백제 아신왕 14년(405) 무렵의 왕인박사라고 하지만, 앞의 기록에 의한다면 이미 그 이전에 불경의 전래와 더불어 문자가 알려져 있었으며 왕인박사는 본격적으로 문자를 가르치고 일깨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백제는 성왕 32년 (554)에 담혜(景慧) 등 승려 아홉 명을 일본에 보내어 도심(道深) 등의 일곱 승려와 교대하게 했다고 하니, 아마도 일찍부터 일본에 해외 주재 불교 교화 승단을 파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어 위덕왕대에는 경, 론, 율사, 선사, 비구니, 불공(佛工) 등을 일본에 보냈으며 일본에서도 고구려나 백제에 들어와 승려가 되어 불법을 배워 갔습니다. 특히 무왕 3년(602)에 관륵 (觀勒)은 삼론의 대가로서 불교 외의 학문에도 능통하였는데 일본으로 건너가 최초의 승정(僧正)이 되어 일본 불교교단의 기강을 바로잡았습니다.

▲ 금동 보살반가상 7세기 신라시대 불상

신라의 진흥왕은 왕권을 강화하고자 정치적 이념으로서 미륵사상을❹ 채용하여 국선화랑 단체인 풍월도를 조직하였고, 원광(圓光) 법사는 화랑 오계를 일러주어 불교의 국가적 적응을 도모했습니다. 한편 교학으로는, 원광법사가 유식 계통의 섭론학을 연구하였으며 중국으로 건너가 《해심밀 경소》를 남긴 원측의 눈부신 활약과 원효가 당의 현장에게 유식을 배우러 유학을 시도했던 사실 등으로 보면 신라에는 유식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이었던 자장(慈藏)은 율학에 능했습니다. 백제가 소승률을 중심으로 하였다면, 자장은 대승적 율학을 담당했습니다. ‘계를 저버리고 백 년을 살기보다는 차라리 계를 지키며 하루를 살다 죽겠다' 고 한 자장은 당(唐) 나라와 신라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계를 주고 보살계본(菩薩成本)을 강설한 율학의 대가였습니다. 그로 인해 신라의 교단은 질서가 확립되었으며 불법이 크게 숭상되어, 당시 국민으로서 열 집 가운데 여덟, 아홉 가구가 계를 받고 부처님을 받들었다고 합니다. 자장은 율학과 더불어 화엄사상에도 깊은 이해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속가를 절로 만든 원녕사 낙성식 때 화엄 만게(萬偈)를 설했으며, 법회 도중 53녀가 현신했으므로 53그루의 지식수를 심었습니다. 또 중국의 오대산에서 화엄의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귀국하여 신라의 문수도량으로서 오대산을 설정하여 문수 진신을 친견하고자 했습니다. 이와 같이 그는 화엄학자이며 문수 신앙자이며 화엄사상을 실현하려 한 사상가였습니다.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즈음부터 법상교학보다는 차츰 화엄교학이 우세하게 되어 통일신라기에는 화엄 우위의 불교가 됩니다.

삼국 공히 국가적으로 불교를 수용하였으며, 특히 신라는 왕실 중심의 귀족불교적 성향이 강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서민의 삶과 함께하며 중화에 앞장섰던 혜숙(惠宿), 혜공(惠空), 대안(大安)과 같은 선각자가 있어 신라불교를 더욱 빛내고 있습니다. 국선의 낭도 출신이었던 혜숙은 시골 마을에서 민중들을 교화했고, 귀족 집의 심부름꾼 출신이었던 혜공은 삼태기를 등에 지고 길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갖가지 신이(神異)를 보이면서 불심(佛心)을 전했습니다. 원효가 여러 경전의 소를 저술할 때 늘 혜 공에게 물었다고 하니 그 높은 덕은 가히 짐작할 만합니다. 대안은 저잣거리에서 동발(銅鉢)을 두드리며 '대안(大安), 대안(大安)'이라 외치면서 민중을 교화했습니다. 나중에 원효도 이들의 맥을 이어 소성 거사(小姓居士)라 자칭하며 무애박을 들고 노래하고 춤추며 천촌만락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널리 백성들을 교화했습니다. 당시 성안의 큰 사원에서 왕실이나 귀족을 중심으로 최고의 생활을 누리던 승려사회의 풍토 속에서 이러한 민중 교화의 방편은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신라불교는 온 나라 구석구석까지 전파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Note :
❶삼론종(三論宗)은 《중관론》《십이문론》《백론》의 삼론에 근거한 중국 불교의 논종(論宗)이다. 삼론은 도안(道安: 312-385)의 권유로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이 한역한 《대품 반야》《소품 반야》등의 초기 대승경전에 의해 용수(龍樹: c.150-c.250)의 중관파 논서들 가운데 용수의 중관론, 십이지문론 그리고 용수의 제자 제바(提婆)의 백론을 말한다. 구마라습  수재(秀才)들에 의해 삼론이 연구되면서 삼론학파(三論學派)가 형성되었다. 중국 불교 삼론종은 인도 불교의 중관파에 대한 중국 명칭이다. 중국 불교 삼론정은 인도 불교 중관파와 달리 《열반경》의 여래장사상을 수용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사상을 전개시킨 것에 특징이다.
❷율종(律宗)은 율법을 지키는 종파라는 뜻으로 율(律)은 부처님께서 일시에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의 상황과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정하셨다. 『동문선』에는 이인로(李仁老)의 「율업수좌도행관고(律業首座都行官誥)」가 들어 있다. 이로써 율업은 율학을 전공하는 교파임을 알 수 있다. 흔히 계율종이라고 일컫는 것을 이 율업이라고 할 수 있다. 「율업수좌도행관고」에는 ‘형추남악지고풍(夐追南岳之高風)’, 즉 남악의 높은 유풍(遺風)을 따랐다는 뜻의 글귀가 보인다. 여기서의 남악이란 남산, 곧 남산율종(南山律宗)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 남산율종은 당나라의 도선(道宣)이 이룩한 종파이므로, 이 도선의 남산율종을 남악의 고풍(高風)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율업은 당시 고려에서 율을 전업으로 하는 학파 또는 종파를 일컬었던 것이며, 아울러 후대의 남산종과 같은 종파임을 알 수 있다.
❸《법화경》의 안락행품(安樂行品)은 부처가 입멸한 후세 악하고 혼탁한 세상에서 불도에 들어가는 수행으로 네 가지 안락행[四安樂行]을 설하고 있다. 이 네 가지 안락행을 구족해야 보살들은 고난을 극복하고 비로소 깨달음을 지킬 힘을 얻어서 경전을 수지하고 펼 수 있게 된다고 밝히시는 것이다. 안락행이란 열반, 불도에 들어가는 행이다. <안락행품>의 뜻에 대해서 천태대사는 세 가지로 해석한다. 첫째는 수행상태에 의거하면, 몸에 생사고의 위험이 없으므로 안(安), 마음에 우비고뇌가 없으므로 락(樂), 몸이 편안하여 마음이 즐거우므로 행(行)이라 한다. 둘째 경문에 의거해서 해석하면, 인욕의 경지에 머물러 있어서 몸이 편안하며, 마음이 조급하지 않아서 즐거우며, 제법실상을 관하므로 수행이 나아가게 된다. 셋째 법문에 의한 해석이란, 안은 육도의 생사와 이승의 열반도 움직일 수 없는 부동에 안주하는 법문이다. 낙은 범부 내지 원교에도 감수하지 않으니 집착하지 않으므로 고도 락도 없는 대락(大樂)을 말한다. 행은 집착함이 없어서 범부 내지 현성(賢聖)의 행도 행하지 않는 무행(無行)을 말한다. 
❹미륵사상은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앞날을 보시고 앞으로 내 법이 상법, 중법, 말법 시대가 지난후 미륵부처님이 나타나 용화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진리를 완성시켜 세번의 설법을 통해서 중생을 부처로 말들고 말세가 된 세상을 구하여 지상을 용화낙원으로 만든다고 남기신 말씀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미륵경》에는 <미륵상생경>, <미륵하생경>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미륵이 이 세상에 나와 세상을 구원해준다는 신앙을 담고 있으며, 혁명적 사상을 담고 있어 한국과 중국에서 민중의 지지를 받는다. 기독교에서 세상을 구원한다는 메시아(Messiah)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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