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붓다교리

한국 불교의 특징

by 파장波長 2022. 5. 4.

B.C. 5세기경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기원을 전후하여 중국에 전해 지고 다시 300여 년이 지난 4세기경에 우리 나라에 전래되며, 이어 한국 불교는 200여 년 후에 찬란한 불교문화를 일본에 전해 주었습니다. 반도에 위치한 우리나라는 대륙과 해로를 통하여 전해진 불교사상과 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우리 문화를 더욱 풍부히 하고, 다시 바다 건너 문화의 불모지인 일본에 고등종교와 문화의 총체로서의 불교를 전하여 주었습니다. 만주 일대와 한반도를 터전으로 해와 달, 돌과 나무 등 자연을 숭배 하며 살아온 우리 민족은 외래의 종교이자 거대한 문화체계인 불교를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신앙에 형식과 체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불교 본연의 보편성과 우리 민족 고유의 깨끗한 신앙심이 전혀 이질감 없이 어우러져,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이 단군의 홍익인간 사상 속에 녹아든 것이 바로 한국불교의 모습입니다. 

불교가 처음 이 땅에 전해진 것은 삼국과 가락국(가야)을 포함한 네 나라가 존재하던 시대입니다. 국가의 공인 순으로 보면 삼국 가운데 고구려가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고구려 제17대 소수림왕 2년(372)에 중국 전진(前秦)의 부견왕이 사신과 순도(順道) 스님을 보내 경전과 불상을 전했고, 이어서 (374) 아도(阿道) 화상이 왔으며, 이듬해 최초의 사찰인 초(성)문사와 이불란사가 세워졌습니다. 이것이 공식적인 한국북교 최초의 전래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 공인의 사실일 뿐, 넓은 영토를 점유한 북방의 강대국이었던 고구려에 당시 이미 300여 년의 전통을 가진 중국불교가 그 이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백제는 제15대 침류왕 원년(384) 9월에 동진(東秦)에서 배를 타고온 인도승 마라난타를 왕이 궁궐로 맞아들여 예경함으로써 불교를 공인했으며, 그 이듬해 2월 한산(漢山)에 절을 짓고 열 사람의 출가승려를 배출했습니다. 이와 같이 바다를 건너온 외국의 승려를 왕이 친히 맞이하고 극진히 받들며 그의 가르침을 듣고 배워 다섯 달 만에 사찰을 짓고 승려를 배출 할 정도로 백제는 국가적 차원에서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볼 때 백제에도 이미 그 전부터 불교가 알려졌으며 그 유용성이 인정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신라에는 불교 공인 이전에 고구려에서 승려가 와서 교화하기도 하고 병을 고쳐 주기도 했으며 어떤 승려는 신라인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도 전해집니다. 그러나 국가적으로는 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무속과 연계된 기존 세력의 강한 반발을 누르며 비로소 공인되었습니다.

삼국시대 한반도의 남쪽 낙동강 유역에 위치하였던 가락국에 대해서는 그곳에 남방 인도로부터 불교가 전해졌다는 설이 있는데, 수용되었던 흔적만 엿볼 수 있을 뿐 아직 확실한 근거와 시기를 밝혀내지 못했습나다.

이와 같이 고구려나 백제는 처음부터 불교를 국가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신라에서는 불교가 공인되기까지 적잖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법흥왕에 이어 진흥왕이 즉위하면서 정책적으로 불교를 크게 일으켜 이후 우리 나라 불교문화의 구심점이 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됩니다.

부처님 나라와 호국불교 

삼국 모두 불교를 국가적으로 받아들여 권장한 이래로 통일신라, 고려 그리고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한국불교는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전개되었습니다. 삼국에 처음 전래된 불교의 교설은 소박한 업설(業說), 즉 인과한복설(因果禍福說)❶이었다.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순도는 인과로써 가 르치고 화복으로 이해시켰으며, 이어 고국양왕대에는 '불법을 숭신하고 복을 구하라'는 영을 내렸다. 이후 광개토왕은 평양에 아홉 사찰을 지어 복을 닦고 죄를 멸할 도량을 마련하였다. 이는 구복(求福)의 가르침으로 써 불교를 믿게끔 국가적으로 권장한 것이다. 백제 역시 같은 영을 내려 업설에 의해 백성을 다스렸다. | 신라의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하여 흥륜사를 짓고 백성들에게 복을 구 하도록 했을 뿐 아니라 몸소 출가하여 법공(法空)' 이라 이름하였으며, 왕비도 영흥사를 지어 그 절로 들어가 비구니가 되어 법명을 '묘법(妙 法)이라 하였다. 몸소 출가승의 모습을 보인 법흥왕에 이어 진흥왕대에 는 미륵사상에 토대를 둔 전륜성왕 사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한반도를 통일할 사상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다. 나라의 미륵으로 숭앙되는 국선(國仙)과 그 아래 미륵을 장엄하는 아름다운 무리로서의 화랑을 두고 국선과 화랑을 보좌하고 돕는 낭도(郞徒)로 구성된 풍월도(風月道)가 바 로 그것이다. 신라는 과거부터 부처님과 인연이 깊은 땅이니[佛緣國土 說]이 땅이 바로 정토이며 여기에 불국토를 구현해야 한다는 이념아래 풍월도를 통한 미륵정토, 즉 용화세계를 구현하려 했다. 그 용화세계를 다스리는 왕이 곧 전륜성왕이니 신라의 왕은 그러한 위치에서 신라뿐 아 니라 온 삼국을 정법으로 다스려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 다 불국토사상은 불교를 숭앙하는 마음이 곧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며 불 교가 나라의 어려움까지도 보살피는 호국불교의 성격을 낳게 된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도 ‘훈요십조'❷에 불법을 숭상하고 비사(佛事)를 일으킬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고려불교는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며 백성을 편안히 하고 나라를 지키는 호국적 성격이 극에 달했었습니다. 그리고 절과 탑의 지나친 창건으로 국민의 경제가 극도로 어려워져 군역이나 부역의 의무를 피해 출가하는 이들이 늘어나자 승단의 질이 떨어지고, 팔관회나 연등회 등의 수많은 행사로 인하여 불법에 대한 믿음이 마치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전부인양 형식적으로 흐르는 경향까지 있었습니다. 

한편 불법으로 나라를 지키려는 신념하에 꽃피운 찬란한 문화유산들도 많았으니 그중 으뜸가는 것이 바로 고려대장경입니다. 최초의 대장경 조판은 현종 원년(1010) 거란의 침입 때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불법에 기원한 것이었습니다. 40여 년에 걸쳐 완성된 이 초조장경(初雕藏經)은 고종 19년(1232) 몽고란 때 불타버렸습니다. 강화도로 천도한 고종은 몽고의 침략을 극복하기 위해 온 국민이 단결하여 부처님의 가호를 빌고자 다시금 대장경 재조에 착수하여 마침내 16년 만에 완성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고려대장경 또는 재조장경(再雕藏經)이라 하며, 그 판의 수가 팔만여 판이라 하여 팔만대장경이라고도 합니다. 이 장경은 양의 풍부함은 말할 것도 없고 교정이 정밀하고 다른 장경에 없는 것까지 수록하고 있어 지금까지도 전세계적으로 불교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보배입니다.

불교의 호국성은 흥불의 시대뿐 아니라 불교의 핍박기인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져 왜란과 호란 때에 선봉적인 승병의 활약으로 나타났고, 일제 암흑기에는 만해 한용운과 백용성 스님 등이 민족대표 33인의 일원으로서 3. 1운동을 주도하고 지방 각 사찰에서 독립운동을 직간접으로 후 원하고 참여하는 불교의 자주성으로 나타났습니다.

종파를 넘어선 통불교 

한국불교는 종파를 초월한 통불교(通佛敎) 입니다. 통불교라 함은 이미 중국에서 성립된 종파불교를 전제로 할 때 그것을 지양한 불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우리 나라에서는 중국에서 한 종파가 들어오더라도 그것에만 그치지 않고 다른 종파의 가르침을 아우르며 나아가 치우침 없는 중도적 시각에서 모든 가르침을 원융하게 화합해 냈던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중국 종파불교의 지양일 뿐 아니라 연기적 관점에 의하여 모든 대립과 극단을 넘어섰던 불교 본래의 입장을 되찾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과는 달리 우리 나라는 단일민족이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래로 줄곧 단일국가 체제를 유지해 왔습니다. 이러한 점은 한국불교를 너의 불교-나의 불교로 가르지 않고 '우리' 의 불교라는 하나의 불교(一乘)를 추구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일찍이 삼국의 신라에서는 이 땅이 곧 불국토이며 우리가 곧 부처라는 이해가 뿌리내렸으니, 연기적 시각과 중도적 불교관이 이때에 이미 정립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떠한 경전이나 불교사상이 들어오더라도 중도적 관점에서 치우침 없이 소화해낼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일심과 화쟁(和靜)을 외쳤던 원효나 화엄법계가 그대로 미타의 정토라고 한 의상과 같은 이들은 바로 이런 토양 위에서 배출 되었습니다. 원측은 중국에 건너가 유식학도로서 중관과 유식을 중도적 입장 에서 통일하고 구유식과 신유식을 비판적으로 종합하는 등 일미(一味)와 일승(一乘)의 시각을 이국 땅에 심어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라의 유식학자들은 유식과 더불어 여래장이나 계율, 정토, 밀교 등 각 분야에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쳤으며 신행에서도 통불교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선법이 전래된 이래 고려시대에는 선과 교의 대립을 지양하기 위하여 선교겸수(禪敎兼修)에 힘썼습니다. 의천은 우리 나라에 천태종을 세움으로써 교종과 선종을 화회(和會)시키려 하였으며, 지눌은 선종의 입장에서 화엄을 비롯한 교종을 통섭하여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창했습니다. 요세는 천태의 법화삼매 행법에 의거한 백련결사를 주도했습니다. 이것은 교관겸수(敎觀兼修), 현밀원통(顯密圓通), 선정겸수(淨兼修)를 총체적으로 행한 모임이었습니다. 독경, 참선, 주력(呪力), 염불 및 참회가 어우러진 종합적인 수행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우리 불교 신행의 형태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유자(儒者)들에 의한 극심한 배불정책으로 산중승단 시대를 맞게 되어 종파라는 이름조차도 세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의 불교는 밖으로는 유불도(儒佛道) 삼교의 회통에 힘썼으며, 안으로는 간경(看經) · 참선 · 염불 수행을 겸수하는 통불교적 모습이 필연적이었 습니다. 이때에 형성된 승가교육 방법이나 내용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온다.

이와 같이 우리 불교는 한 가지 경전, 한 가지 종파를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경전을 통하여서도 연기, 중도의 한 가지 맛을 보며 선이나 교 어디에도 치우침 없이 함께 깨달음에 이르는 통불교적 모습을 지향해 왔던 것입니다.


Note :
❶인과한복설(因果禍福說)은 불교 전래와 함께 처음으로 받아들인 교설은 인과화복(因果禍福)의 교설, 곧 업설(業說)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인과론은 불교 교설의 근본 논리이며, 업설은 그 교리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불교는 인간의 의지적 작용을 업(業), 이에 대한 자연의 필연적 반응을 보(報)라고 하며, 업에는 반드시 과보가 따른다고 한다. 업보의 관념은 숙세·현세·미래의 삼세에 걸쳐 전개되는 업보윤회설(業報輪廻說)로 발전된다.
훈요십조(訓要十條)는 고려 태조 왕건이 숨지기 한 달 전인 943년(태조26) 4월에 직접 작성한 문서이다. 글자 그대로 후대에 교훈이 되는 10가지 조항의 중요한 정책이라는 뜻의 훈요십조는 고려 왕조가 존속한 500년 내내 중대한 정책을 결정할 때마다 하나의 기준과 근거로 활용되었다. 훈효십조 1조에, 국가의 대업은 여러 부처의 호위를 받아야 하므로 선(禪) · 교(敎) 사원을 개창한 것이니, 후세의 간신이 정권을 잡고 승려들의 간청에 따라 각기 사원을 경영, 쟁탈하지 못하게 하라.

'붓다교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붓다의 평화관  (0) 2022.05.04
붓다의 경제윤리  (0) 2022.05.04
삼국시대 불교 구법과 전법  (0) 2022.05.04
통일신라의 교학불교와 선법(禪法)  (0) 2022.05.04
선교겸수(禪敎兼修)의 고려불교  (0) 2022.05.0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