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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경전/금강경

금강경 제6품 정신희유분

by 파장波長 2022. 5. 10.

제6품 바른 믿음이 드물다

 

第6品・正信希有分 

須菩提 白佛言, 世尊! 願有衆生, 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不?
수보리 백불언, 세존! 파유중생, 득문여시언설장구, 생실신부?
佛告須菩提, 莫作是說!
불고수보리, 막작시설!
如來滅後, 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爲實,
여래멸후, 후오백세, 유수계수복자, 어차장구, 능생신심, 이차위설,
當知是人,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而種善根, 已於無量千萬佛所, 種諸善根,
당지시인, 불어일불이불삼사오불이종선근, 이어무량천만불소, 종제선근,
聞是章句, 乃至一念生淨信者. 須菩提!
문시장구, 내지일념생정신자. 수보리!
如來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無量福德,
여래실지실견, 시제중생, 득여시무량복덕,
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無法相, 亦無非法相,
하이고? 시제중생, 무부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무법상, 역무비법상,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卽爲著我人衆生壽者, 若取法相, 卽著我人衆生壽者. 
하이고? 시제중생, 약심취상, 즉위차아인중생수자, 약취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
何以故? 若取非法相, 卽著我人衆生壽者. 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하이고? 약취비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 시고, 불응취법, 불응취비법,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이시의고, 여래상설, 여등비구! 지아설법, 여별유자, 법상응사, 하황비법?

부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 마라. 여래가 멸한 뒤 오백 년 후 지계(特戒)해서 복을 닦는 자가 있어서 이 구절을 진실한 것으로 생각해 신심이 생길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한 부처, 두 부처, 세 부처, 네 부처, 다섯 부처에서 선의 뿌리를 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에서 선의 뿌리를 심어, 이 구절을 듣거나 한 생각만으로도 깨끗한 믿음이 생길 것이다. 수보리여! 여래는 모두 알고 모두 본다. 이 모든 중생이 이렇게 한없는 복덕을 받을 것이다. 왜 그런가? 이 모든 중생은 다시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을 갖지 않으며, 법상을 갖지 않고, 비법상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이 모든 중생이 만약 마음에 상을 갖는다면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에 집착할 것이며, 만약 법상을 갖는다면 아상 · 인상 ·중생상 · 수자상에 집착할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만약 비법상을 갖는다면 아· 인·중생 · 수자에 집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을 취하지도 말고, 법이 아닌 것을 취하지도 말아야 한다. 이런 뜻에서 여래는 항상 말한다. ‘그대들 비구는 내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다는 것을 알라.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이라?”


참다운 믿음

수보리가 부처께 말했다. “세존이시여! 중생들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서 참다운 믿음이 생길까요?" 부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 마라.”

須菩提 白佛言,“世尊!頗有衆生, 得聞如是言說章句, 生實信不?"
수보리 백불언 세존파유중생 득문여시 언설장구 생실신부 
佛告須菩提,“莫作是說!" 
불고수보리 막작시설

우리는 『금강경』에 대해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금강경』은 말하자면 스승과 제자간의 문답을 기록한 것으로, 하나의 극본과도 같습니다. 그러니 마음의 문을 좀 더 활짝 열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부처는 수보리에게,  모든 상(相)은 허망한 것일 뿐이라 말합니다. 그러니 혹시 꿈속에서라도 부처를 보았거나 혹은 진짜로 부처가 구름 위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면 여러분은 마경에 빠져 있는 겁니다. 그건 진정한 부처가 아닙니다. 쫓아가서 돌멩이로 치거나 『금강경』으로 후려쳐도 괜찮습니다. 일체의 상(相)은 모두 허망한 것이라고 네가 직접 말하지 않았느냐? 만약 모든 상(相)이 상(相)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면 여래를 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래 놓고 이제 여기 와서 무얼 하겠다는 건가?” 이렇게 한번 크게 나무라 보아도 좋겠지요.

절대로 상(相)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일단 상에 사로잡히게 되면 뒤에 가서는 정신병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께 재삼 말씀드리고 또 경고합니다만 절대로 상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선종이 이어져 내려오면서 후에 이와 관련하여 “단하가 나무 불상을 태우다[丹霞燒木佛]”라는 고사도 생겨났습니다.

단하선사(丹霞禪師)는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대제자로서 이미 방장(方文)을 맡고 있었습니다. 겨울이 되어 날씨는 추운데 땔감이 없자 대전에 있던 목불(木佛)을 끄집어 내려서는 쪼개서 불을 지폈습니다. 절 살림을 맡아보던 스님이 나와서 그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부처를 태우다니! 그 죄가 얼마나 큰지 모르는가? 인과(因果)가 있을 것이야!”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말한 순간 그 스님의 수염과 눈썹이 그 자리에서 떨어져 버리는 일이 생겼습니다. 피부 한 층이 벗겨져 나간 것입니다. 부처의 상은 단하가 태웠건만 인과는 도리어 그 일을 나무란 사람에게 떨어졌습니다. 선종의 묘한 공안(公案) 입니다. 이것 역시 진정한 불법은 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임을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공부할 때는 결코 상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일단 상에 사로잡히면 아주 엄중합니다.

부처의 이런 설법에 대해 이 품에서 수보리는 회의를 표합니다. 수보리가 말합니다. “부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후 중생들이 그 말씀을 듣고서 [衆生得聞如是言說章句], 특히 『금강경』과 같은 이론이 후세에 전해졌을 때 참다운 믿음이 생겨날 수 있을까요[生實信不]? 그들이 과연 믿을 수 있을까요? 중생들은 부처를 믿으면서 모두 상(相)을 붙들고자 하는데, 완전히 상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부처가 수보리에게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지 말게![莫作是說]” 이어서 부처는 예언을 합니다.


오백 년 후

“여래가 멸한 뒤 오백 년 후 지계(持戒) 해서 복을 닦는 자가 있어서 이 구절을 진실한 것으로 생각해 신심이 생길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사람은 한 부처, 두 부처, 세 부처, 네 부처, 다섯 부처에서 선의 뿌리를 심은 것이 아 니라, 이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에서 선의 뿌리를 심어.” 

如來滅後, 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爲實.
여래멸후 후오백세 유지계수복자 어차장구 능생신심 이차위실 
當知是人,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而種善根,已於無量千萬佛所, 種諸善根, 
당지시인 불어일불이불삼사오불이종선근 이어무량천만불소 종제선근

일체의 상(相)이 없으며, 일체의 상에 집착 하지 않아야만 비로소 부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귀신의 상에 떨어져 하루 종일 그 경계에서 소란을 피워 댄다면, 스스로 상에 집착하는 길로 접어든 겁니다. 사소한 일로 번거로움을 자초하여 이미 마도(魔道)로 떨어져 버린 겁니다. 이 때문에 수보리는 부처에게 묻습니다. 부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후세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또 진정으로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부처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내가 죽은 뒤 오백 년이 지나면(如來滅後, 後五百歲)”, 그런데 여기서 왜 오백 년 이라 했을까요? 부처가 세상에 있던 시기를 정법 시대(正法時代)라 하며, 부처가 세상을 떠난 이후를 상법 시대(像法時代)라 합니다. 바로 불상과 불경이 있는 시기입니다. 불경이 모두 없어지고 단지 미신만이 있는 시기를 말법 시대(末法時代)라 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는 말합니다. “내가 세상을 떠난 뒤 오백 년 후에는 진정으로 지계(持戒)하고 수복(修福)하며 많은 선을 행하고 공덕을 쌓는 사람이 있어서 그의 지혜가 열리면 이 말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니라.” 부처가 말한 "오백 년 후” 라는 구절은 주로 후세를 가리킵니다.

부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계(持戒)하고 수계(守戒)하며 복보(福報)를 닦아, 복보를 성취한 후 비로소 무상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요. 지혜란 한 개인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총명하게 태어나는 것도 모두 한 생애 한 세대의 일이 아닙니다. 무상의 지혜를 얻고자 하나, 이것은 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닦아서 얻는 것입니다. 일체의 선행과 공덕을 닦아야만 비로소 무상의 지혜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지혜는 깨달아 얻는 것입니다. 지계(持戒)와 수복(修福)으로 부터 오는 것입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이 누적되고 거기에다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받들어 행하는 수복이 더해질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대복보인 대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부처는 여기서 특별히 제시합니다. 그가 죽은 뒤 오백 년 후 지계와 수복을 행하는 자가 있어서 비로소 자신의 말을 믿 을 수 있을 것이라고요.

오백 년 후의 문화는 더욱더 변할 텐데,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물질문명은 시대가 흐를수록 더욱 발전합니다. 그러나 인문이나 도덕, 정신의 측면은 시대가 갈수록 오히려 타락하고 퇴보합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시대의 진보를 말하는 것은 물질문명의 측면입니다. 불법은 인문적 관점에서 시대를 보고 있습니다. 오백 년이 지나면 사람의 지혜가 더욱더 흐려져, 말법 시대에 이르면 사람의 경우 열두 살이 되면 아이를 낳을 수 있고 또 두뇌가 비상하게 발달한 반면, 사지나 손발은 갈수록 작아질 겁니다. 지극히 총명하나 지혜가 없어, 초목조차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겁니다. 말을 바꾸면 재난과 질병, 전쟁이 수시로 존재하는 때가 말법의 시기입니다. 우리는 아직 여기에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오백 년 후 선을 행하고 복을 닦은 자가 있어서 불경의 “모든 상은 다 허 망하니, 만약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보리라[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설법에 대해 능히 믿음을 가질 수 있고 또 능히 주해(註解)할 수 있다면, 비로소 진정한 반야의 지혜가 드러 날 겁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믿을 때에는 모두 형식적인 것을 중시하며, 그들 중 태반은 무얼 바라는 마음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을 구하고자 합니다.

사원에 가면 절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큼직한 바나나 송이와 떡을 사고, 향을 한 뭉치 사 가지고 와서는 음식을 올리고 향을 피우고 절합니다. 그러면서 신명께 빕니다. 가족들을 잘 보우해 주시고, 건강하도록 해 주시고, 복권이 당첨되도록 해 주시고, 사업이 번창하도록 해 주시고, 모두 모두 잘되도록 해 주십시오. 그런 뒤 바나나를 도로 가져가 야금야금 먹습니다. 보십시오! 쥐꼬리만한 돈을 내놓고서 요구하는 것은 이렇게 많습니다! 제가 만약 부처나 신이라면 이런 짓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흥! 이 친구, 문제 많은 친구군! 겨우 돈 몇 푼 내놓고 일체를 모두 원만하게 해 달라고? 그렇게 안 되면 이 보살더러 영험하지 못하다고 할 테지? 보살 노릇도 못해 먹을 짓이군.

하느님은 결국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도 하늘과 마찬가지로 어렵습니다. 보살이라면 더더욱 어려울 겁니다. 두 사람이 소송을 벌이는데, 둘 다 향을 피워 놓고 도와 달라 빕니다. 소송에서 이길 수 있게 해 달라는 겁 니다. 보살은 결국 어느 쪽을 도와야 할까요? 보살이 어느 쪽 바나나가 더 많은지, 어느 쪽 돼지 머리가 더 큰지를 보고 결정하겠습니까? 이런 것들은 모두 종교 의식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심리학적 측면에서 본다면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자주 사람들이 종교 의식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들의 견해를 요약하면 이치로는 따질 수 없다는 겁니다. 말로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렇지요 할 수밖에요. 이런 식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시 천천히 이야 기하도록 합시다. 장래에 다시 이야기하지요. 아마도 삼대겁(三大劫) 이후 에나 다시 이야기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들어 봐야 이해가 안 될 테니 삼대겁 이후에나 다시 말해 보자는 겁니다.

지금 부처는 이 진리를 말합니다. 아주 평범하지만 믿기 어렵습니다. 부처는 말합니다. 후세에 어떤 사람이 있어서 이 평범한 이치를 대도(大道)라 생각해 그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복보가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복보란 세간의 홍복(鴻福)이 아닙니다!

소위 믿음이 생긴다고 할 때의 믿음이란 미신이 아니라 이성으로 믿는 바른 믿음입니다. 이것을 실재의 진리라 생각한다는 겁니다[以此爲實], 부처는 말합니다. “그대는 알아야 한다. 장래 세상의 이런 사람은 단지 한 명의 부처, 두 명의 부처, 세 명의 부처, 네 명의 부처, 다섯 명의 부처와 같이 지내면서 선(善)의 뿌리를 내린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은 한 생애나 한 세대에 지혜를 닦아서 된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얼마나 많은 생애 동안, 얼마 나 많은 성취자들[無量千萬佛所] 밑에서 배웠는지 모른다! 그는 이미 무수히 많은 선행을 하였으며, 이렇게 큰 선의 뿌리를 심어 놓았기 때문에[種諸善根] 그토록 큰 지혜를 타고나는 것이다.”


깨끗한 믿음과 머무는 바가 없다.

“이 구절을 듣거나 한 생각만으로도 깨끗한 믿음이 생길 것이다. 수보리여! 여래는 모두 알고 모두 본다. 이 모든 중생이 이렇게 한없는 복덕을 받을 것이다.”

聞是章句, 乃至一念生淨信者, 須菩提!
문시장구 내지일념생정신자 수보리 
如來悉知悉見, 是諸衆生, 得如是無量福德.” 
여래실지실견 시제중생 득여시무량복덕

“이런 사람은 방금 내가 말한, '모든 상은 다 허망하니, 만약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라는 말을 믿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한순간에 깨끗한 믿음[淨信]이 나타날 수 있다.”

이 점을 특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깨끗한 믿음을 갖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바른 믿음(正信)이 아니라 깨끗한 믿음(淨信]입니다. 깨끗하고 변화무쌍하며 어떤 망념도 없는, 심경이 극도로 청정한 심지(心地)상의 정토(淨土)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깨끗한 믿음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사람이라면, 한 생애를 깨끗한 믿음으로 일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깨달은 사람이요 이미 진정으로 아무것에도 머물지 않는 경계에 이른 사람이며, 한 생각도 일지 않아 전체가 드러나는 경지에 이른 사람입니 다. 금강경은 처음부터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머무름이 없는 것이 바로 한 생각도 일지 않아 전체가 드러나는 경지로서, 여기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깨끗한 믿음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깨끗한 믿음이란 증득하는 것이지 이론적으로 이해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는 말합니다. “수보리여! 나는 모두 알고 있다. 나 역시 직접 이런 사람을 보았다. 그 자리에서 이미 무상의 복덕을 얻어 버린 사람을 보았다.” 요즘 말로 하자면 진정으로 구원을 얻어서 대복보와 대공덕을 성취한 겁니다. 부처는 단지 이 한 구절만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진리 를 증득하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지혜의 성취에 이르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상(相)을 갇지 않는다.

“왜 그런가? 이 모든 중생은 다시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을 갖지 않으며, 법상을 갖지 않고, 비법상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何以故? 是諸衆生, 無復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無法相, 亦無非法相.”
하이고 시제중생 무부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무법상 역무비법상

깨끗한 믿음에 이른 사람이라면 무릇 형체를 갖춘 것은 모두 올바른 것이 아니며, 일체가 상(相)이 없고, 심지어 상이 없다는 것조차도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라면 대복보를 얻은 겁니다. 왜 그럴까요? 이 사람은 현생에서 이미 부처의 경계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육체를 지닌 부처인 것입니다. 왜 그를 두고 부처의 경계에 도달했고 말하는 것일까요? 이 사람은 이미 무인상(無人相), 무아상(無我相)에 이르러 진정으로 깨끗한 믿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생각을 놓아 버리니 당연히 인상(人相)도, 중생상(衆生相)도, 수자상(壽者相)도 없습니다.

사상(四相)은 대단히 엄중한 것입니다! 인생의 일체 고통과 번뇌는 모두 사상으로부터 생겨납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사상이란 네 가지 관념으로서,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네 가지 현상입니다. 사람마다 아상(我相)은 매우 무겁습니다. 사람은 곳곳에서 아상(我相)에 떨어집니다. 이 아상을 떨쳐 버릴 수 있다면 거의 다 이룬 겁니다. 아상을 떨쳐 버리면 당연히 무상(無相)으로서 일체가 평등합니다.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이며, 천하 남녀가 모두 내 부모이며, 천하 자녀가 모두 내 아들이요 딸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아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상이 없으니 자연 인상(人相)이 없고, 또 인상이 없으니 자연 중생상(衆生相)도 없어 평등합니다. 그리고 소위 수자상(壽者 相)이란 것도 없으니 오래 사나 짧게 사나 매한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이 서로 통하고, 장수(長壽)와 요절(天折)이 다르지 않으며, 삶과 죽음이 한 줄기가 됩니다. 바로 장자의 관점입니다. 삶과 죽음은 하나의 이치 입니다. 아침과 저녁과도 같습니다. 저녁이 되면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상(相)이란 그것이 바깥에 있을 때는 현상이며, 심리상에 있을 때는 관념, 즉 주관적 관념입니다. 다음 두 가지는 더 중요합니다. “법상이 없는 것[無法相]”, 일체의 불법 및 불법이라 불리는 모든 것을 놓아 버려야 합니다. 무릇 모든 상(相)은 허망한 것이므로, 일체의 상에 집착하지 않고 모두 놓아 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모두 놓아 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법상이 없는 것” 입니다. 그렇지만 이건 알아야 합니다. 어떤 것도 아니며, 일체가 모두 아니며, 부처도 아니요, 아니라고 하는 것 역시 아니라고 한다면 다시 ~이다[是]' 에 떨어지고 맙니다. 어떤 것이 ‘~이다[是] 일까요? “법이 아닌 것[非法是] 입니다. 일체를 부정하더라도 미안하지만 다시 '긍정'에 떨어지고 맙니다. 이 긍정이 바로 “법이 아닌 것도 없는 것[無非法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일체가 모두 '~이 아니요’ 일체가 역시 ~입니다.

어떤 사람은 금강경을 공부하면서, 이것은 분명 공(空)을 말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건 틀린 생각입니다. 『금강경』은 “무법상(無法相)”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무비법상(無非法相)”을 말합니다. 일체가 모두 공(空) 이라 생각하는 것은 틀린 겁니다. 일체가 유(有)라고 하는 것도 일체가 공 (空)이라는 생각이 변화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능엄경」에서 부처는, 일체 의 상을 떠나되, 일체의 법에 즉한다[一切相, 卽一切法]”라는 유명한 말을 합니다. 여기서 "일체의 상을 떠난다”는 것은 바로 “무법상(無法相)”을, 그리고 일체의 법에 즉한다”는 것은 “역무비법상(亦無非法相)”을 뜻하는 것 입니다. 즉 "일체의 상을 떠나되, 일체의 법에 즉한다” 라는 것은, 일체를 떠나는 것 역시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강경』은 절대로 공(空)을 말 한 것이 아닙니다. 『금강경』이 말하는 바는 법신(法身)을 볼 때, “모든 상이 허망하다[凡所有相, 皆是虛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천하고 수행할 때는 다릅니다. 부지런히 선을 행하고, 한 생각 한 생각이 모두 선해야 합니다. 이것이 공(空)일 수는 없습니다.

선종의 대철대오한 대사들은 불법을 배우는 기본 이치를 이렇게 말합니다. “실제적인 이치의 견지에서는 티끌 하나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온갖 행위를 할 때에는 어느 법 하나도 버리지 않는다.” 여기서 “실제적인 이치의 견지에서는 티끌 하나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본체를 말한 것이고, “온갖 행위를 할 때에는 어느 법 하나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행위에서는 공(空)일 수 없다는 것을 말 합니다. 한 생각 한 생각이 모두 유(有)입니다. 악을 행하지 않고, 뭇 선을 받들어 행합니다. 그러므로 실천 중에는 하나의 법도 버리지 않습니다. 어느 것이든 모두 유(有)입니다. 공(空)이 아닙니다. 우리 불법을 배우는 사 람들은 이 이치를 먼저 뚜렷이 알아야 합니다. 아래에서 다시 삼중(三重)의 이유를 말합니다. 부처는 모든 품에서 정면(正面)과 반면(反面)을 반복 해서 설명한 뒤 최후로 종합하여 하나의 결론을 내립니다.


“왜 그런가? 이 모든 중생이 만약 마음에 상을 갖는다면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에 집착할 것이며, 만약 법상을 갖는다면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에 집 착할 것이기 때문이다.”

“何以故? 是諸衆生, 若心取相, 卽爲著我人 衆生壽者,
하이고 시제중생 약심취상 즉위착아인 중생수자 
若取法相, 卽著我人 衆生壽者." 
약취법상 즉착아인 중생수자

부처는 말합니다. “왜 그런가?[何以故]”가령 어떤 사람이 심리적으로 상에 집착해 불법을 배운다면, 예를 들면 오늘은 향을 피우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은 절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것들이 바로 상에 집착한 것입니다. 일체 중생의 마음속에 있는 부처에 대한 신앙은 모두 상에 집착해 있습니다. 바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해 있습니다. 그러나 상에 집착하는 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간혹 한 종교가 다른 종교에 대해 우상이나 미신을 숭배한다고 매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종교에서 말하는 바른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상 숭배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바로 상에 집착한 것, 즉 법상(法相)을 취한 것입니다. 여전히 “바른 믿음이 아니다” 라는 관념에 떨어져 있는 겁니다.


"왜 그런가? 만약 비법상을 갖는다면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에 집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을 취하지도 말고, 법이 아닌 것을 취하지도 말아 야 한다.”

“何以故? 若取非法相, 卽著我人衆生壽者, 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하이고 약취비법상 즉착아인중생수자 시고 불응취법 불응취비법

여기서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이렇습니다. “공(空)이라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건 불법이 아니다. 유(有)에 집착하는 것도 불법이 아니다. '비공비유(非空非有)' 또한 옳지 않다. 즉공즉유(卽空卽有)' 또한 불법이 아니다.”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불법은 '능단금강반야바라밀(能斷金剛般若波羅蜜) 입니다. 도를 깨치기 위해서는 진정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부처는 또 아주 거리낌 없이 이것이 무슨 이치인지를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법을 취해서도 안 되고, 법이 아닌 것을 취해서도 안 된다[是故, 不取法, 不應取非法]”라는 겁니다. 진정으로 불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상에 집착해서는 안 되며, 상에 집착하지 않아도 안 됩니다. 이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금강경』에서 말한,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한다[應無所住]”, “법을 취해서는 안 된다[不應取法]”라는 것의 의미를 이해했습니다. 하나의 불법을 붙들고 수행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 경우 어떤 하나의 것에 떨어지고 맙니다. 이것은 상에 집착한 것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것도 붙들지 않는다고요? 그건 더 잘못된 것입니다. 어떨 때는 참이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법이 아닌 것을 취해서도 안 된다[不應取非法]”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곳이 피안인가

"이런 뜻에서 여래는 항상 말한다. 그대들 비구는 내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다는 것을 알라.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이 아닌 것이랴?”

“以是義故,如來常說, 汝等比丘!
이시의고 여래상설 여등비구
知我說法,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지아설법 여벌유자 법상응사 하황비법

부처는 제자들에게 분부합니다. “그렇기에 평시에 그대들에게 가르쳐 왔지만[以是義故, 如來常說], 그대들 나와 함께 출가한 천이백 사람[汝等比丘]은 내 설법이 강을 건너는 배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知我說法, 如後喩者].” '벌(後)'이란 나무를 묶어 강을 건너는 데 사용하는 뗏목입니다. 이미 강을 건너 땅 위로 올라갔다면, 강을 건너고서도 뗏목을 등에 지고 가야 하겠습니까? 이런 바보 같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부처가 말합니다. 내 설법은 모두 방편적인 것이다. 모두 강을 건너는 배이다. 이미 해안에 닿았다면 뗏목은 필요 없다. 그러므로 내가 말한 법은 뗏목과 같다. 하나의 비유입니다. 일체의 진정한 불법도 최후에는 강을 건너고 난 배처럼 버려야 하거늘[法尙應捨], 하물며 법이 아닌 일체의 것이겠는가! [何況非法] 바른 법[正法]조차도 최후에 이르러서는 깨끗이 버리지 않으면 도를 이룰 수 없습니다. 하물며 바른 법이 아닌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더욱 상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는 여기서 이 점을 아주 철저하게 말합니다.

 

 글은 남회근 선생의 '금강경 강의'에서 참조하고, 인용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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