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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경전/금강경

금강경 제8품 의법출생분

by 파장波長 2022. 5. 12.

제8품 일체의 부처가 이 법으로부터 나온다. 

 

8·依法出生分 

須菩提! 於意云何? 若人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所得福德, 寧爲多不? 
수보리! 어의운하? 약인만삼천대천세계칠보, 이용보시, 시인소득복덕, 영위다부?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何以故? 是福德, 卽非福德性, 是故如來說福德多.
수보리언, 심다, 세존! 하이고? 시복덕, 즉비복덕성, 시고여래설복덕다.
若復有人, 於此經中, 受持乃至四句等, 爲他人說, 其福勝彼.
약부유인, 어처경중, 수지내지사구게, 위타인설, 기복승피.
何以故? 須菩提! 一切諸佛, 及諸佛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 皆從此經出.
하이고? 수보리! 일체제불, 급제불아뇩다라삼막삼보리법, 개종차경출.
須菩提!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수보리! 소위불법자, 즉비불법.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운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이 사람이 얻는 복덕이 많지 않겠는가?” 수보리가 말했다. “아주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 복덕은 복덕의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若人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수보리 어의운하 약인만삼천대천세계칠보 이용보시 
是人所得福德, 寧爲多不?" 
시인소득복덕 영위다부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何以故? 是福德, 卽非福德性, 是故如來說福德多." 
수보리언 심다. 세존 하이고 시복덕 즉비복덕성 시고여래설복덕다.

우리 보통 사람은 단돈 만 원을 보시하고서도 복보를 바랍니다. 바나나 몇 개를 놓고, 향 몇 자루를 태우며 절하고는 무얼 바랍니다. 지금 이 사람은 삼천대천세계의 칠보로써 보시하니, 바나나 몇 개, 향 몇자루  돼지 머리니 하는 것보다 많아도 한참 많습니다. 당연히 얻는 복보도 아주 많을 겁니다. 부처가 이어 말합니다. “왜 그런가?" 부처는 말합니다. “그대는 잘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복보(福報)를 바란다고 하지만, 복보란 본래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정해진 본성이 없다는 것이다[是福德, 卽福德性].”

예를 들어 봅시다. 오늘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는데 어떤 사람이 와이셔츠 차림으로 나왔다가 마침 인심 좋은 처사를 만났습니다. 처사는 그 사람이 추울까봐 털옷이나 외투를 벗어 입혔습니다. 그 사람은 정말로 복이 있어 처사를 만났습니다. 만약 오늘이 아주 더운 날이라면, 그래도 그 사람에 게 털옷이나 외투를 입히겠습니까? 그랬다간 그 사람이 때려죽이려 할 겁니다. 그래서 소위 복보란 어떤 경우는 복보이지만, 다른 경우에는 고통일 수 있습니다. 복보라는 것이 본래 어떤 정해진 본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복덕이나 복보라도 어느 시기가 지나면  즉 어느 정도 향수(享受)하고 나면 역시 공()입니다. 본래 자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소위 자성이 없다는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영원히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부처가 말한 복은 바로 이런 복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부처는 하나의 비밀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복보는 오도(悟道), 즉 대지혜의 성취라는 겁니다. 이것은 현실 세계를 초탈해서 얻는 대성취로서, 이 성취는 세간에서 얻은 일체의 복보로써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래는 복덕이 많다고 합니다. 부처는 말합니다. “이런게 보시하면 그 결과 복덕은 아주 클 것이다.” 사실 부처가 복덕이 크다고 말한 것은 교육을 하기 위한 하나의 격려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전 중의 내용을 수지(受持) 하거나 혹 사구게를 다른 사람을 위해 말해 준다면 그 복은 앞의 복덕보다 나을 것이다.”

“若復有人, 於此經中, 受持乃至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勝彼.” 
약부유인 어차경중 수지내지사구게등 위타인설 기복승피

부처는 지혜와 교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어떤 사람이 불세계(佛世界)에 가득 찬 칠보로써 보시한다면 이 사람의 복보는 아주 클 겁니다. 그렇지만 가령 어떤 사람이 금강경을 이해하거나 사구게(四句偈)를 이해한 후 사람들을 인도하여 번뇌로부터 해탈하게 한다면, 이 사람의 복보는 삼천대천세계의 칠보로써 보시한 사람보다 훨씬 더 클 겁니다.


일체의 부처와 『금강경』

왜냐하면 수보리여! 일체의 부처와 모든 부처의 아누다라삼막삼보리 법이 모두 이 경전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何以故? 須菩提! 一切諸佛, 及諸佛阿耨多羅三流三菩提法, 皆從此經出." 
하이고 수보리 일체제불 급제불아두다라삼막삼보리법 개종차경출

“왜 그런가?” 부처가 말합니다. “내 그대에게 말하노니, 일체의 부처, 즉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성취를 이룬 사람, 대철대오의 지혜를 성취한 일체의 부처가 모두 이 경전으로부터 나온다.” 이 시대에 석가모니불이 왔던 것처럼 이 겁수()에는, 우리는 이 겁을 현겁(賢劫)이라 하는데, 이 현겁에는 모두 천 명의 부처가 나타납니다. 석가모니불은 네 번째 부처입 니다. 다섯 번째 올 부처는 미륵불인데, 당연히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이후 계속해서 천 명의 부처가 나타납니다. 이 겁수는 성현이 가장 많이 나타나는 시기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것은 지구가 형성된 때부터 빙하기까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의 우주관으로서, 이 겁수의 시 간은 대단히 깁니다. 거의 무한정의 시간이나 다름없습니다.

부처는 말합니다. 일체의 성불한 사람, 대철대오했거나 석가모니처럼 도를 깨친 사람, 이때의 도()란 아누다라삼막삼보리로서 최후의 대철대오를 말하는데, 이런 사람은 모두 『금강경』으로부터 나온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반야, 즉 자신의 진정한 지혜로부터 나온다는 겁니다. 『금강경』은 지혜를 꿰뚫어 본 뒤 그것을 보고한 것입니다. 진정한 불법은 모두 자신의 지혜로부터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금강경』을 들어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일체의 부처와 부처의 지혜는 모두 금강경으로부터 나옵니다.


불법은 불법이 아니다.

“수보리여! 이른바 불법이란 불법이 아니다.”

“須菩提! 所謂佛法者, 卽非佛法." 
수보리 소위불법자 즉비불법

금강경을 보면 부처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 니다! 부처는 앞에서 아주 좋다고 말합니다. 복이 말할 수 없이 크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복은 불법만큼 그렇게 훌륭하지는 못합니다. 부처는 최후에는 불법 또한 부정해 버립니다. “소위 불법이란 불법이 아니다. [所謂佛法者, 卽非佛法]”라는 겁니다.

무엇을 불법이라 할까요? 도를 깨닫는 것입니다. 도를 깨달았다고 해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기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단견(斷見)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없다는 것은 곧 없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봅시다. 성불한 사람이 자기가 살아 있는 부처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이 두들겨 패도 괜찮습니다. 그건 요괴지 부처가 아닙니다. 부처란 얻을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무상(無相) 중에 존재합니다. 진정으로 큰 성취를 얻은 사람은 지극히 겸손하고 온화합니다. 그리고 대단히 평범하여 아무것도 없습니다. 진정한 부처는 자신을 부처라 생각하지 않으며, 진정한 성인은 자신을 성인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불법은 불법이 아닙니다. 만약 불법에 대한 하나의 관념이 존재한다면 이미 상에 집착한 것입니다. 좋게 말하면 상에 집착한 것이요, 나쁘게 말하면 마()에 집착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의 특징입니다. 소위 『대반야경』은 지혜가 극에 이르러 한 점의 흔적도 남기지 않습니다. 말하고 난 뒤 곧 뒤집어 버립니다. 마치 교육자와 같습니다. 많은 사람을 가르쳐서 모두 성공시켰다고 스스로 대스승이라 확신한다면, 그는 이미 스승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교사일 뿐 입니다. 진정으로 훌륭한 사람은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 일체 중생을 제도하고 교화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 다. 행하고 나면 그만입니다. 마음속에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금강경』의 이런 구성 방식에 대해 후세의 많은 유가(儒家)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청나라의 대유학자인 고정림(顧亭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일지록(日知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학생들은 불경을 볼 필요가 없다. 불경에는 볼 만한 것이 없다. 바로 한 통의 물이다. 하나는 차 있고 하나는 비어 있는데, 차 있는 것을 들어 빈 통에 붓고, 다시 찬통을 빈 통에 붓는 것이다. 이렇게 이리 붓고 저리 붓고 해 봐야 한 통의 물일 뿐이다.” 고정림은 소위 불법이라 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리 붓고 저리 붓고 하니, 말하지 않은 것이나 같다는 겁니다!

이 품에서는 불법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대복덕은 지혜의 성취입니다. 이 품의 제목으로 붙여진 “의법출생(依法出生)”이란 불법에 의거하여 일체의 성현이 도를 깨친다는 이치입니다.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고 나면 이어서 다음 품에서 큰 문제가 제기되지만, 우리는 먼저 이 품의 결론부터 내려 보기로 합시다.

 

  글은 남회근 선생의 '금강경 강의'에서 참조하고, 인용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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