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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경전/금강경

금강경 제9품 일상무상분

by 파장波長 2022. 5. 13.

제9품 어떤 깨달음도 깨달음의 상이 없다.

 

第9品 ・ 一相無相分 

須菩提! 於意云何? 須陀洹, 能作是念, 我得須陀洹果不?
수보리! 어의운하? 수보리, 능작시념, 아득수다원과부? 
須菩提言. 不也 世尊.
수보리언. 불야 세존.
何以故? 須陀洹名爲入流, 而無所立, 不入色聲香味觸法, 是名須陀洹.
하이고? 수다원명위입류, 이무소입 불입색성향미촉법, 시명수다원 
須菩提! 於意云何. 斯陀含, 能作是念, 我得斯陀含果不?
수보리! 어의운하. 사다함, 능작시념, 아득사다함과부?
須菩提言. 不也 世尊!
수보리언. 불야, 세존 
何以故? 斯陀含, 名一往來, 而實無往來, 是名斯陀含.
하이고? 사다함, 명일왕래, 이실무왕래, 시명사다함.
須菩提. 於意云何. 阿那含, 能作是念, 我得阿那含果不?
수보리. 어의운하. 아나함, 능작시념, 아득아나함부?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阿那含, 名爲不來, 以實無不來, 是故名阿那含.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아나함, 명위불래, 이실무불래, 시고명아나함. 
須菩提! 於意云何? 阿羅漢, 能作是念, 我得阿羅漢果不?
수보리! 어의운하? 아라한, 능작시념, 아득아라한도부?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實無有法, 名阿羅漢.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실무유법, 명아라한.
世尊! 若阿羅漢作是念, 我得阿羅漢度, 卽爲着我人衆生壽子.
세존! 약아라한작시념, 아득아라한도, 즉위착아인중생수자.
世尊! 佛說我得無諍三昧, 人中最爲第一,  是第一離欲阿羅漢.
세존! 불설아득무경삼매, 인중최위제일, 시제일이육아라한.
世尊! 我不作是念, 我是離浴阿羅漢. 世尊, 我若作是念, 我得阿羅漢道,
세존! 아불작시념, 아시이욕아라한. 세존, 아약작시념, 아득아라한도
世尊卽不說須菩提, 是樂阿蘭那行者, 以須普提 實無所行, 而名須菩提, 是樂阿蘭那行.
세존즉불설수보리, 시락아란나행자 이수보리실무소행, 이명수보리, 시락아란나행.

성문사과(聲聞四果) : 소승(小乘)의 사과(四果)

일상무상분에서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등 성자의 네 가지 지위 즉 성문사과(聲聞四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수다원은 입류(入流) 또는 예류(預流)라고 합니다. 여기서 류(流))라고 하는 것은 거룩한 무리(聖類)라는 의미로 수다원을 얻은 사람은 굵고 무거운 번뇌를 여의고로 성스러운 류에 들어갔다는 것이며, 들어감이 없다한 것은 과를 얻었다는 마음이 없다는 것으로, 수다원이란 것은 닦아 행하는 사람의 첫째 초과(初果)입니다. 

상좌부(上座部) 소승 불교에서는 아라한이 되는 것이 불교수행자가 추구해야 할 목표라고 보고 있습니다. 팔리어 불교 경전은 아라한이 되는 4단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① 수다원(須陀洹)은 팔리 원어 소타판나(sotapanna:전향)를 음사한 말로써 번역하여 예류(預流) 또는 입류(入流)라고도 합니다. 미혹을 끊고 성자의 대열에 들어선 사람이며 부처와 그의 가르침과 승가(僧)에 대한 잘못된 믿음과 의심을 극복함으로써 도달되는 단계입니다. 사다함(斯陀含)은 일래(一來)이며, 한 번 다시 태어나면 다시는 재생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며 탐욕과 증오와 미망을 줄임으로써 도달되는 단계이다.

② 사다함(斯陀含)은 사카다가민(sakadagamin)의 음사이며 일래(一來)로 번역됩니다. 한 번 다시 태어나면 다시는 재생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며 탐욕과 증오와 미망을 줄임으로써 도달되는 단계입니다. 

③ 아나함(阿那含)은 안아가민(anagamin)의 음사이며 불환(不還) 또는 불래(不來)라고 번역됩니다. 욕계(欲界)의 번뇌를 모두 끊어 결코 다시 태어나는 일이 없는 성자를 가리킵니다. 죽은 다음 색계나 무색계에 나고 거기에서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앞의 두 단계를 얻은 뒤 감각적 욕망과 그릇된 의지를 이겨내면서 얻게 됩니다. 


④ 아라한(阿羅漢)은 팔리어 아라한트(arahant)의 음사이며 '고귀한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완전해진 사람, 존재의 참 본질에 대한 통찰을 얻어 열반(涅槃) 또는 깨달음에 이른 사람을 일컫는 것 입니다. 불도(佛道)를 성취하는 데 보다 높은 목표가 보살이라고 확신하는 대승불교에서는 아라한의 이상을 비판합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데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윤회하는 세계에 남아 있기를 서원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라한을 약칭하여 '나한'이라고도 합니다. 


초과의 나한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수다원이 스스로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는가?” 수보리가 말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須菩提! 於意云何? 須陀洹 能作是念, 我得須陀洹果不?
수보리! 어의운하? 수다원 능작시념, 아득수다원과부? 
須菩提言 不也, 世尊! 
수보리언 불야, 세존!

부처가 다시 수보리에게 묻습니다. “그대 생각은 어떤가? 초과나한은 마음속으로 이미 자신이 수다원과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는가?” 그 뜻은 이렇습니다. 도를 깨친 사람이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자기가 이미 도를 깨쳤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라는 겁니다. 만약 진짜 이런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이 정신 병원으로 데려 가야 할 겁니다. 성인(聖人)이나 학문이 높은 사람이 도처에 간판을 내걸고 스스로 학문이 높다고 말한다면 어찌 미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학 문이 깊어지면 생각이 평온하다[學問深時意氣平]”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학문에 일가견을 이루면 생각이 온통 평화롭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과위(果位)를 얻은 나한은 어떻겠습니까? 그러므로 수보리는 부처의 질문을 듣고 곧 불가능하다고 대답합니다.


왜냐하면 수다원을 일러 입류(入流)라 하나, 들어간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형체, 소리, 맛, 냄새, 촉감, 법에 들지 않은 것을 일러 수다원이라 합니다.”

何以故? 須陀洹名爲人流, 而無所入, 不入色聲香味觸法, 是名須陀洹.
하이고? 수다원명위입류, 이무소입, 불입색성향미촉법, 시명수다원.

수다원은 바로 예류과(預流果)로서, 예류란 곧 입류(入流)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흐름[流]으로 들어간다는 것일까요? 성인(聖人)의 흐름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미 성인의 대오에 들어서 있습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깨달은 도는 이미 법성(法性)의 흐름에 들어섰다고요. 법성은 인성이 아닙니다. 인성이란 추하고 더러운 일면으로, 우리의 인성이 이쪽 면이라면 법성은 저쪽 면입니다. 그는 이미 보통의 욕망이나 감정, 애욕으로부터 벗어나 청정한 법성의 면으로 진입했습니다.

부처는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초과나한에 도달할 수 있는가?” 부처는 여기서 이미 공부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했던 것은 원칙입니다. 소위 흐름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도리어 들어가는 바가 없다고 합니다. 말을 바꾸면 그는 공(空)의 경계, 바로 연기(緣起)가 일어나지 않는 경계를 증득했다는 것입니다. 연기성공(緣起性空), 곧 성공(性空)을 증득하여 온갖 생각이 모두 공(空)인 경계에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는 그가 색에 들지 않는다[不入色]고 말합니다. 눈에 보여도 보지 않습니다. 일체의 사람이나 형상, 청산녹수(靑山水)가 보기에 좋을지라도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보통 사람은 좋은 것을 보면 곧 결사(結使)가 나타나서 거기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초과나한은 좋은 경계에 사로 잡히지 않습니다. 마음이 평온하고 담담하여 아무 일도 없습니다. 형체, 소리, 냄새, 맛, 촉감, 법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떤 경계일까요? 바로 머무는 바가 없는 경계입니다. 진정 머무는 바가 없습니다. 인간 세상의 처세나 처사에서 사람에게 이익이 되도록 하며, 일체의 것에 머물지 않는 경지에 이른 겁니다. 마음속에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무한한 공덕을 행하면서도 지나가면 그만입니다. 언제든 이럴 수 있습니다. 타좌를 하든 하지 않는 언제나 이 경계가 지속됩니다. 이렇게 되어야만 비로소 초과 나한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과와 삼과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사다함이 스스로 사다함과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는가?” 수보리가 말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須菩提! 於意云何? 斯陀含, 能作是念, 我得斯陀含果不?
수보리! 어의운하? 사다함, 등작시념, 아득사다함과부?
須菩提言, 不也, 世尊!
수보리언, 불야 세존!"

부처가 다시 수보리에게 이과나한에 관해 똑같이 묻습니다.


왜냐하면 사다함을 일러 일왕래(一往來)라 하나, 실로 왕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일러 사다함이라 합니다.

何以故? 斯陀含, 名一往來, 而實無往來, 是名斯陀含. 
하이고? 사다함, 명일왕래, 이실무왕래, 시명사다함.

이과나한은 단지 한 차례만 인간으로 옵니다. 명의상으로는 한차례 다시 온다고 하지만, 오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이치일까요? 많은 사람은 죽음에 이르러 과거의 빚이 청산됩니다. 어떤 때는 한 번 입태(入胎)하여 태아 단계에서 유산됨으로써 끝납니다. 그 일생으로 빚을 다 갚은 겁니다. 이건 진짭니다! 진정으로 하는 말입니다. 듣기엔 아무 근거도 없는 것 같을 겁니다. 많은 경우 부모와 인연은 좋지만 짧은 시간에 그 연(緣)을 끊습니다. 그는 다시 올 필요가 없습니다. 마땅히 자식을 위해 기뻐해야 합니다. 그는 이미 성취를 얻은 사람으로, 단지 부모에게 골육의 정이라는 약간의 부채를 짊어지웠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부모 역시 그에게 눈물의 빚을 짊어지웠습니다! 부모가 상심하여 눈물을 흘림으로써 장부가 청산된 겁니다. 이것이 이과(二果) 사다함입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아나함이 스스로 아나함과를 얻었다고 생 각하겠는가?

須菩提, 於意云何? 阿那含, 能作是念, 我得阿含果不? 
"수보리, 어의운하? 아나함, 등작시념, 아득아나함과부?

아나함은 불환과(不還果) 입니다. 이 생애로써 모든 것이 결산됩니다. 이것이 삼과(三果) 입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아나함을 일러 불래(不來)라 하나, 실로 오지 않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나함이라 합니다.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阿那含, 名爲不來, 而實無不來, 是故名阿那含.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아나함, 명위불래, 이실무불래, 시고명아나함.

삼과나한은 이과나한보다 높아, 인간으로 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역시 일정하지 않습니다. 다시 올 수도 있습니다. 그에겐 이미 생사가 없어 오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단지 나한은 음(陰)에 막혀 미혹 되기[음지미 陰之迷] 때문에 한 번 투태하면 미혹될 뿐입니다. 삼과(三界) 이상에 이르면, 정력(定力)이 높은 사람은 미혹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제가 이 나이에 쫓아다닐 수도 없어 얻어듣지 못하지만, 젊어서 대륙에 있을 때는 도처를 쫓아다니면서 이상한 일도 많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제 친구 중에 사천(四川)에 살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저에게 자기의 세 생애를 다 기억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아주 이름난 사람으로서 학문도 뛰어나고 문장도 훌륭해 경솔하게 그런 이야기를 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삼과(三果)에 이르러 다시 온 사람은, 어떤 때는 뚜렷이 알면서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삶과 죽음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기 때문입 니다. 어떤 사람은 입태(入胎) 시에는 미혹되지 않으나 태 속에 머물면서 기억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입태 시나 태 속에서는 미혹되지 않으나 출태하는 순간에 미혹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람에 따라 상황은 다릅니다. 이것은 삼과나한의 정력(定力)의 차이에서 기인된 결과입니다.

이 품에서는 삼과나한에 대해 “이를 일러 불래(不來)라 하나, 실제로 오지 않음이 없다[名爲不來, 而實無不來]”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삼과나한은 생 사의 왕래가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아라한이 스스로 아라한 도를 얻었다고 생각하겠는가? 수보리가 말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실로 법이 있지 않은 것을 아라한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阿羅漢, 能作是念, 我得阿羅漢道不?
수보리! 어의운하? 아라한, 능작시념, 아득아라한도부? 
須菩提言,“ 不也, 世尊! 何以故? 實無有法, 名阿羅漢.
수보리언. "불야, 세존! 하이고? 실무유법, 명아라한.

아나함은 인세간(人世間)인 이 욕계에 다시 오지 않는다고 하는데, 실제로 오지 않을까요? 여전히 오려고 합니다. 절대 오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사과(四果) 아라한에 이르기 위해서입니다. 대아라한은 한 번 입정(入定)에 들면 팔만 사천 대 겁이나 지속됩니다. 지구가 생겼다 없어지고, 없어졌다가 다시 생기기를 반복할 동안에도 그는 입정 상태에서 깨어나지 않습니다. 일단 깨어난다면 어떻게 할까요? 역시 대승으로 방향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반야의 지혜를 통해 해탈해야 비로소 성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소승의 앞길은 대승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소승의 성문(聲聞)으로부터 대승으로 향해야만 진정한 성취가 가능합니다. 진정한 사과(四果) 아라한 에게는 실로 법이라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어떤 하나의 구체적인 법도 그것이 공(空)이라 증득한 것이 없습니다. 아직도 공의 경계가 있다면, 그것은 변견(邊見)에 떨어진 것입니다. 스스로 변(邊)이 없다고 말한다면, 다시 견칙견(見取見)에 떨어집니다. 이들은 모두 견지(見地)가 참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공은 공의 경계가 없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 있는 분들 중 타좌를 아주 잘해 스스로 공의 경계에 들어섰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공의 경계를 신체보다 조금 더 범위가 큰 것이라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건 공이 아니라 하나의 구멍입니다. 이런 공이라면 변견 중에서도 작은 변견입니다.

왜 사람들이 공의 범위를 정해 변견으로 떨어질까요? 지혜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지력(智力)과 심력(心力)에는 한계가 있어서 이런 견해를 갖게 됩니다. 소위 『금강반야바라밀경』은 한도가 없습니다. 범위도 없이 무한합니다. 최후로 우리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것은 수보리가 한 말 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스스로 아라한 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에 집착한 것입니다.

世尊! 若阿羅漢作是念, 我得阿羅漢道, 卽爲著我人 衆生壽者.” 
세존! 약아라한작시념, 아득아라한도, 즉위착아인 중생수자."

수보리의 생각에는, 아라한의 경계에 도달했더라도 그 사람에게는 아라한의 과위를 증득했다는 생각이 조금도 없으리라는 겁니다. 만약 이런 생각이 있다면, 이 생각으로부터 온갖 생각이 파생되어 도리 없이 그 생각에 말려들고 말 겁니다. 이 때문에 『화엄경(華嚴經)』에서는 “제망중중(帝網重重)”이라 했습니다. 제(帝)란 크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사상이나 감각, 정감 등은 마치 비할 데 없이 큰 그물과 같아서, 하나의 그물 구멍이 움직이면 다른 구멍들도 모두 따라서 움직입니다. 바로 "제망중중" 입니다. 한 생각이 움직임으로써 백 천 만 억의 생각들이 모두 우리 수지(修持)나 심성(心性)의 업력 속에서 끌려 움직입니다. 유(有)라 말하면 일체가 유(有)요,공(空)이라 말하면 일체가 공(空)입니다. 바로 이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대아라한이 스스로 아라한의 경계를 증득했다고 생각한다면, 그에게는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의 사상(四相)이 모두 있는 것이 되므로, 단지 진정한 의미의 범부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도를 얻지 못한 것입니다. 선종식으로 표현하자면, 어떤 사람이 스스로 이미 깨쳤다고 말한다면 그건 바로 말씀 언(言) 변에 입(口]과 하늘(天)을 합친 ‘착오[誤]' 입니다. 그래도 스스로 대철대오(大徹大悟)했다 생각한다면 그건 바로 대착대오(大錯大誤)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람이 수중에 천만 원을 지니고 있을 때와 이치가 같습니다. 그는 절대로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향해 자기가 돈을 가졌다고 떠들어 대지 않을 겁니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인데, 하물며 도를 깨친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도를 깨친 사람이라면 절대로 스스로 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수보리는 이어서 스스로 마음으로 얻은 바를 보고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뛰어난 사람

세존이시여! 부처께서는 제가 다툼이 없는 삼매를 얻었으며, 사람 중 제일 뛰어나고, 제1의 욕구를 떠난 아라한이라 하셨습니다.

世尊! 佛說我得無諍三昧, 人中最爲第一, 是第一離欲阿羅漢. 
세존! 불설아득무쟁삼매, 인중최위제일, 시제일이욕아라한.

수보리가 말합니다. 부처가 수보리에게 이르기를, 그가 이미 다툼이 없는 삼매[無諍三昧]를 증득하여 일체의 것에 대해 다투지 않는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에게 욕을 하든, 아첨을 하든, 하느님 아버지라 큰 소리로 부르는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듣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듣고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환희도 없고 슬픔도 없습니다. 옳고 그름이 하나로서 일체 다툼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스스로 욕구를 떠난 아라한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아라한 도를 얻었다 생각했다면,

世尊! 我不作是念, 我是離欲阿羅漢, 世尊! 我若作是念, 我得阿羅漢道,
세존! 아부작시념, 아시이욕아라한, 세존! 아약작시념, 아득아라한도,

수보리가 말합니다. “비록 세존께서 제가 이미 그런 경계에 이르렀다고 평가하시더라도, 저로서는 절대 그런 관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이미 사람 중의 제일인자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미 아라한 도를 얻었다고는 더욱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세존께서는 수보리가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 말씀하시지 않았을 겁니다. 수보리가 실로 행하는 바가 없기에 수보리를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 하신 겁니다.

世尊則不說須菩提, 是樂阿蘭那行者, 以須菩提實無所行, 而名須菩提, 是樂阿蘭那行. 
세존즉불설수보리, 시락아란나행자, 이수보리실무소행, 이명수보리, 시락아란나행. 

어떻게 말할까요? “가령 부처께서 제가 이미 이욕아라한을 증득했다고 평가하신다면, 즉 사람 중의 제일인자요 학생들중 최고라 하신다면, 저 자신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할 일입니다. 조금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제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부처께서는 제가 적정(寂靜)을 즐기는 행자(行者)라 말씀하시지 않았을 겁니다.” 적정이란 지극히 청정한 것입니다. 산에서 살기를 좋아하니 자연 하나의 적정한 절이 생겨납니다. 절은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자신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늘 언급하는 옛사람의 시와 같습니다.

“사람마다 영산의 탑이 있으니, 영산의 탑을 향해 닦음이 좋으리[人人有靈山塔, 須向靈山塔下修].”『능엄경』에 나오는 고덕(高德)의 게송입니다.

이 품은 바로 사과나한의 수행법을 설명합니다. 『금강경』에서 토론하고 있는 중점은 어디에 있을까요? 머무는 바가 없는[無所住] 것입니다. 이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서도 마음속에 도를 얻었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머무는 바가 있는 것으로 잘못된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 은 게송으로 결론을 삼고자 합니다.

 

∴  글은 남회근 선생의 '금강경 강의'에서 참조하고인용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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