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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경전/금강경

금강경 제10품 장엄정토분

by 파장波長 2022. 5. 13.

제10품 장엄한 정토

 

第10品·莊嚴淨土分 

佛告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昔在然燈佛所, 於法有所得不? 
불고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석재연등불소, 어법유소득부?
不也, 世尊! 如來在然燈佛所, 於法實無所得.
불야, 세존! 여래재연등불소, 어법실무소득.
須菩提! 於意云何? 菩薩莊嚴佛土不? 
수보리! 어의운하? 보살장엄불토부?
不也, 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불야, 세존! 하이고? 장엄불토자, 즉비장엄, 시명장엄.
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시고, 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생청정심,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應無所住, 而生其心!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為大不? 
응무소주, 이생기심! 수보리, 비여유인, 신여수미산왕, 어의운하? 시신위대부?
須菩提言, 甚大, 世尊! 何以故? 佛說非身, 是名大身.
수보리언,  심대, 세존! 하이고? 불설비신, 시명대신.


마음을 비워 급제해서 돌아가다. 

장엄정토(莊嚴淨土)는 대반야의 정토이자 부처의 정토로서 단지 서방 극락정토를 가리키는 것만은 아닙니다. 소위 장엄정토란 일념도 일지 않는 상태에서 전체가 드러나는 것으로, 마음이 청정하고 공(空)에 이르렀을 때가 진정한 정토입니다.

선종 단하조사(丹霞祖師)는 여순양(呂純陽)과 마찬가지로 당나라 사람으로서, 이들은 모두 과거 시험을 보러 가다가 중도에서 그만두고 도를 닦은 사람들 입니다. 단하조사는 과거를 보러 가던 중 우연히 한 사람과 한담을 나누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 기상이나 재주를 보건대 왜 하필 과거 시험을 보려는지 모르겠소. 강서(江西)의 시험장에 도착하거든 마조(馬祖)나 찾아보시구려. 성불할 수 있다면 과거를 보는 것보다 나을 것이오” 라고 했습니다. 그 후 단하조사는 곧장 마조를 찾아 나섰는데, 이것이 단하선사의 공안(公案)입니다. 단하의 선당(禪堂)에는 다음과 같은 대련 한 수가 적혀 있습니다.

차시선불장 (此是選佛場), 여기는 부처를 뽑는 시험장, 
심공급제귀 (心空及第歸), 마음이 공(空)에 이르면 급제해 돌아가리.

우리 선당 역시 과거 시험장으로 부처를 뽑는 시험장이니, 마음이 공 (空)에 이르면 곧 정토로서 시험에 합격하리라는 겁니다. 진정으로 이 일념이 공에 이를 수 있다면 시험에 합격할 수 있으니, 마음이 공에 이르면 급제해서 돌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불교 공부의 귀결점도 바로 이 일념이 공에 이르는 것으로, 우리는 이것을 흔히 현재의 현실정토라 부릅니다. 이 때문에 부처도 불경에서 이르기를, “마음이 깨끗하면 국토도 깨끗하다[心淨則國土淨]”라고 했습니다. 도처가 모두 정토요 도처가 모두 극락세계이니, 마음이 깨끗하기만 하다면 국토가 깨끗합니다. 『금강경』의 이 품에 양(梁)나라 소명태자는 “장엄정토” 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부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 생각은 어떤가? 여래가 옛적 연등불 계시던 곳에서 법에 대해 얻은 바가 있었겠는가?”

佛告須菩提,“於意云何? 如來昔在然燈佛所, 於法有所得不?” 
불고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석재연등불소, 어법유소득부?”

제9품에 일상무상분에서는 부처와 수보리의 대화로서 소승 사과나한(四果羅漢)의 경계를 토론했습니다. 토론은 여기에 이르러 끝납니다. 이제 부처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부처는 말합니다. “오래전 연등불과 같이 지낼 때, 그때 내가 법에 대해 얻은 바가 있었겠느냐?”

여기서 '오래전' 이란 아주 오래전의 일을 말합니다. 전생의 일이 아니라 아주 많은 생 이전의 일로서 부처의 깨달음을 처음으로 인정해 준 스승이 바로 연등불(然燈佛)인데, 후에 『봉신방(封神榜)』이라는 소설에서는 연등 도인이라 묘사되고 있습니다. 연등불은 아주 오래전의 부처로서, 아직 지구가 생기기도 전의 부처입니다. 부처는 말합니다. 자신은 이전에 연등불 밑에서 수행할 때 연등불로부터 전수 받아 깨달음에 이르렀는데, 그때 자신이 얻은 바가 있었겠느냐는 겁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연등불 계시던 곳에서 법에 대해 실로 얻은 바가 없었습니다.

“不也, 世尊! 如來在然燈佛所, 於法實無所得." 
“불야, 세존! 여래재연등불소, 어법실무소득.”

수보리가 말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알기로는 당시 연등불 밑에서 부처께서는 진정한 경계에 이르렀기에 아무것도 얻은 바 없이 일체가 모두 공(空)이었으며, 공 또한 최고도에 이르러서 얻거나 얻지 못한 것뿐 아니라 공의 경계 또한 없었을 겁니다.” 수보리의 대답이 여기에 이르자 부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다른 문제로 넘어갑니다.


장엄한 불토는 어디에 있는가?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보살에게 장엄한 불토가 있는가?”

“須菩提! 於意云何? 菩薩莊嚴佛土不?" 
“수보리! 어의운하? 보살장엄불토부?”

부처는 말합니다. "내 그대에게 묻노니, 그대는 일체의 보살들이 또 다른 세계, 예를 들어 천당이라든지 천당 외의 또 다른 어떤 장엄하고 아름 다운 불토(佛土)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금강경』의 이 구절을 다른 종교에서 묘사하고 있는 천당이나 불국에 대해  비교하면. 일단 서양인이 말하는 천당은 배치부터가 모두 서양식입니다. 그리고 주의해서 보면 모두 유럽 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神)이라든지 공중의 천사들 역시 유럽식입니다. 또 인도인들이 말하는 천당은 모두 인도 식이고, 중국인들이 말하는 천당은 입은 옷까지도 중국식입니다.

그렇다면 천당이나 불토의 궁극적 형상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좋아하는 어떤 것을 그리더라도 어차피 우리 모두가 보지 못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냥 형상일 수밨에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불국세계나 장엄불토란 사람마다 모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황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황금이 지천에 널려 있는 곳을 생각할 테고, 산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부처가 높은 산의 정상에 서 있는 모습을 꿈속에서 만날 겁니다. 얼마나 청정하고 아름다운 모습이겠습까! 결국 장엄불토란 자기가 좋아하는 바라 할 수 있으니, 바로 『능엄경』, 에서 말하는 “중생의 마음에 따라, 자신이 아는 바에 응해 업에 따라 발현될 것이니, 어찌 일정함이 있겠는가?(隨衆生心, 應所知量, 循業發現, 寧有方 所]”입니다.

이 세상의 일체 지식의 범위, 종교 철학의 경계는 모두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마음의 폭에 따라 천당이니 불토니 하는 것들도 크기가 달라질 것이고, 지식의 범위나 양에 따라서도 불국의 크기는 달라질 겁니다.

업에 따라서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똑같이 불법을 배우고 타좌를 하면서도 각자가 본 부처의 모습은 다릅니다. 그대가 본 부처는 코가 좀 높지만 내가 본 부처는 코가 약간 내려앉았다는 둥 뭔가 다를 겁니다. 왜 그 럴까요? 개인의 심경에 나타나는 업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찌 일정함이 있겠습니까? 어떤 고정된 방향도 없고, 어떤 고정된 마음의 작용도 없습니다. 오직 절대적 유심(惟心)이요, 순수한 유심일 뿐입니다.

그래서 부처는 묻습니다. “보살에게 장엄한 불토가 있겠느냐?” 수보리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소위 말하는 장엄한 불토의 세계를 부인합니다.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장엄한 불토라는 것은 장엄하지 않으며, 그 것을 일러 장엄하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不也, 世尊! 何以故? 莊嚴佛土者, 卽非莊嚴,是名莊嚴.” 
“불야, 세존! 하이고? 장엄불토자, 즉비장엄시명장엄.”

『금강경』에서는 늘 이런 변론 방법을 사용합니다. 소위 말하는 장엄불토란? 단지 하나의 형용하는 말에 불과한 것으로, 그것은 “장엄한 것이 아니 다[卽非莊嚴]”라는 겁니다. 실제로 우리가 상상하는 종류의 그런 장엄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장엄은 반드시 청정한 곳입니다. 눈을 감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아무것도 없는 어떤 것, 텅 비어 버린 경계 같은 것이 반드시 생각날 겁니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단지 우리의 상상에 불과한 것으로, 경계에 대한 상(相)은 이미 장엄이 아닙니다. 절대의 청정, 절대의 공(空)은 결코 우리가 상상하는 장엄이 아닙니다. 이것을 일러 장엄하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불가사의하다고 하는 겁니다.

정(正)과 반(反), 그리고 최후로 종합되는 이 세 구절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공(空)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공, 상상 속의 공은 이미 공이 아닙니다. 진정한 불토의 장엄은 스스로 증험해 보지 않고 공연히 상상만 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수보리가 대답한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여!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렇게 청정심이 생기며, 마땅히 색(色)에 머물러 마음이 생기지 않으며, 마땅히 소리 · 냄새 · 맛 · 촉감 · 법에 머물러 마음이 생기지 않으며,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이 생긴다.”

“是故, 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生淸淨心, 不應住色生心, 
“시고, 수보리! 제보살마하살, 응여시생청정심, 불응주색생심,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우리에게 수행 방법을 일러 주고 있습니다. 주의하십시오! 『금강경』은 여기에 이르러 하나의 수행 방법을 말합니다. 이것은 차선의 방법입니다. 최선의 방법은 우리가 이해할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차선의 방법은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 머무는 바가 없는[應無所住] 것입니다. 머무는 바가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수시로 청정심이 새겨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선생님, 이틀 동안은 수행이 아주 잘 됩니다! 청정심이 생겼습니다” 라고 했다 칩시다. 여러분은 『금강경』을 이미 들었기에 잘 알겠지만, 그가 단지 청정심만을 가지려 한다는 것은 이미 앎의 양이나 범위가 상당히 제한되어 있는 겁니다.

현재 부처는 무엇을 청정심이라 하는가에 대해 해석하면서, “색(色)에 머물러 마음이 생기지 않으며 소리나 냄새, 맛이나 촉감, 법에 머물러 마음이 생기지 않아, 머무름이 없이 마음이 생기는 것[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이라고 말합니다. 선종의 육조(六祖)가 처음 깨달음을 얻은 것도 바로 이 구절입니다. "머무름이 없이 마음이 생 긴다” 라는 말을 듣고서 깨달았습니다. 이 마음은 본래 머무는 바가 없지 않은가요! 이 마음이 본래 머무는 바가 없다는 것을 모른다면, 머무는 바가 없다는 것이 필경 공(空)이 되고 말 겁니다. 이런 공의 경계는 옳지 않은 것으로 바로 머무는 것이 됩니다. 즉 공에 머문 것으로, 법에 머물러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말하자면 공의 법에 머문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청정심은 빛이 있는 것도 경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색 (色)이나 소리 · 냄새 · 맛 · 촉감 · 법에 머물지 않습니다. 부처는 진정한 수행은 아무것에도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이 생기는[(應無所住, 而生其心] 것이라 했습니다. 마땅히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머무름이 없고 걸림이 없어야 하며, 사물이 다가오면 응하고 지나가면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곤 하는 이 두 구절의 뜻을 억지로 풀어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아무런 일도 없이 거울처럼 맑아, 경계가 다가오면 비추고 사라지면 없어집니다. 부처는 라이터와 같이 찰칵! 하면 켜지고 사용하지 않느면 사라져 버리는 존재입니다.


스승 때문에 멀어버린 눈

“수보리여! 비유컨대 어떤 사람의 신체가 수미산 같다면, 그대 생각은 어떤가? 몸이 크지 않은가?” 수보리가 말했다. “아주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께서 몸이 아닌 것을 일러 큰 몸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須菩提, 譬如有人, 身如須彌山王, 於意云何? 是身爲大不?”
수보리, 비여유인, 신여수미산왕, 어의운하? 시신위대부?” 
須菩提言,“甚大, 世尊! 何以故? 佛說非身,是名大身." 
수보리언, “심대, 세존! 하이고? 불설비신시명대신.”

수미산(須彌山)이란? 법신(法身)을 말합니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이 생길 수 있다면 초보적 이나마 어느 정도 법신을 증험 할 수 있습니다. 법신은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혀지지도 깨끗해지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법신은 큰 몸(大身)이자 한량 없는 몸(無邊身)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는 말합니다. “그대가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이 생기는 경지에 도달하려면 부처의 법신과 장엄정토에 대해 모두 알아야 한다. 부처의 세계와 부처의 정토는 바 로 이런 것이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다시 그대에게 묻노니, 만약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처럼 크다면, 마치 히말라야 산처럼 그렇게 크고 곤륜 산보다도 더 우람하다면, 그대 생각은 어떤가? 그 몸이 크지 않겠는가?" 이는 하나의 비유로서 법신은 무량무변하고, 또 영원히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고는 마침내 몸이 아닌 것을 일러 큰 몸이라 한다[佛說非身, 是名大身]”라는 최후의 결론에 이릅니다. 우리 육체의 신견(身見)이란? 바로 팔십팔결사(八十八結使) 중에서도 제일 벗어나기 힘든 응어리인데, 이것을 벗어던질 수 있다면 불생불사의 법신을 증득 할 수 있습니다. 

 

 글은 남회근 선생의 '금강경 강의'에서 참조하고, 인용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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