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붓다경전/금강경

금강경 제17품 구경무아분

by 파장波長 2022. 5. 21.

제17품 궁극의 경지에 내가 없다.

 

第17品·究竟無我分

爾時, 須菩提白佛言,“世尊! 善男子,  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이시 수보리백불언 세존 선남자 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 
운하응주 운하항복기심
佛告須菩提,善男子, 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當生如是心, 
불고수보리 선남자 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당생여시심
我應滅度一切衆生, 滅度一切衆生已, 而無有一衆生實滅度者,
아응멸도일체중생 멸도일체중생이 이무유일중생실멸도자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즉비보살
所以者何? 須菩提! 實無有法,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소이자하 수보리 실무유법 발아뇩다라사먁삼보리심자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於然燈佛所, 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어연등불소 유법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不也, 世尊! 
불야 세존
如我解佛所說義, 佛於然燈佛所, 無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여아해불소설의 불어연등불소 무유법득하뇩다라삼먁삼보리
佛言,“如是! 如是!
불언 여시 여시
須菩提! 實無有法,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 실무유법 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須菩提! 若有法,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 然燈佛卽不與我授記,
수보리 약유법 여래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자 연들불즉불여아수가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釋迦牟尼,
여어내세 당득작불 호석가모니
以實無有法,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是故然燈佛 與我授記, 作是言,
이실무유법 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 시고연등불 여아수가 작시언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釋迦牟尼,
여어내세 당득작불 호석가모니
何以故? 如來者, 卽諸法如義 
하이고 여래자 즉제법여자
若有人言,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須菩提! 實無有法,
약유인언 여래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 수보리 실무유법
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불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
須菩提! 如來所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於是中無虛
수보리 여래소득발아뇩다라삼막삼보리 어시중무허
是故如來說一切法, 皆是佛法,
시고여래설일체법 개시불법
須菩提! 所言一切法者, 卽非一切法, 是故名一切法。
수보리 소언일체법 즉비일체법 시고명일체법
須菩提! 譬如人身長大。
수보리 비여인시장대
須菩提言, 世尊! 如來說人身長大, 卽爲非大身, 是名大身
수보리언 세존 여래설인신장대 즉위비대신 시명대신
須菩提! 菩薩亦如是, 若作是言, 我當滅度無量衆生, 卽不名菩薩,
수보리 약보살여시 약작시언 아당멸도무량중생 즉불명보살
何以故? 須菩提! 實無有法名爲菩薩, 是故佛說一切法,
하이고 수보리 실무유법명위보살 시고불설일체법
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무아무인상무중생무수자
須菩提! 若菩薩作是言, 我當莊嚴佛土, 是不名菩薩。
수보리 약보살작시언 아당장엄불토 시불명보살
何以故? 如來說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하이고 여래설장엄불토자 즉비보살 시명보살
須菩提! 若菩薩通達無我法者, 如來說名真是菩薩。
수보리 약보살통달무아법자 여래설명진시보살


무슨 원을 발하는가

그때 수보리가 부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누다라삼막삼보리의 마음을 일으켰다면,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시켜야 합니까?”

爾時, 須菩提白佛言,“世尊! 善男子, 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이시 수보리백불언 세존 선남자 선여인 발아뇩다라삼막삼보리 
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
운하응주 운하항복기심

수보리 역시 우리처럼 꽤나 말 많은 사람인 모양입니다! 『금강경』의 첫머리에서 그는 부처에게 이 두 가지 문제를 물었습니다. 부처가 지금에 이르도록 줄곧 그에게 설명해 왔는데도 이 양반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묻습니다. 선생님, 아직 잘 모르겠는데요! 수보리는 말합니다. “불법을 배우는 사람이 이제 막 대승심을 일으켜 성불하고자 하는데, 즉 명심견성(明心見性)하여 도를 깨닫고자 하는데, 그 마음이 정(定)에 이르지 못하니 어떻게 하면 머물게 할 수 있을까요? 또 어디에 머물러야 할까요? 온갖 생각과 번뇌가 끊이지 않으니 어떻게 그것을 항복시킬 수 있을까요?” 여전히 이 문제입니다. 

부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 선여인이 아누다라삼막삼보리의 마음을 일으켰다면 마땅히 이런 마음이 생길 것이다. 내가 마땅히 일체 중생을 제도하리라. 일체 중생을 제도하면 그만일 뿐, 실제로 어떤 중생도 제도한 자가 없으리라. 왜 그러냐 하면 수보리여! 만약 보살에게 이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佛告須菩提, “善男子, 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當生如是心.
불고수보리 선남자 선여인 발아누다라삼막삼보리심 당생여시심
我應滅度一切衆生, 滅度一切衆生已, 而無有一衆生實滅度者,
아응멸도일체중생 멸도일체중생이 이무유일중생실멸도자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즉비보살

『금강경』의 첫머리에서 부처는 수보리에게 이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서 "선호념(善念)” “응여시주(應如是住)”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의 대답은 다릅니다. 부처는 수보리에게 말합니다. 이제 막 불법을 배우려는 사람, 대철대오해서 아누다라삼막삼보리의 마음을 발하려는 사람은 마땅히 이런 마음이 생긴다〔當生如是心〕는 것입니다. “여시심 (如是心)” 이란 어떤 마음일까요?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발원(發願)입니다. 뜻을 세우는 것입니다. 발원은 곧 입지(立志) 입니다. 입지는 무엇을 하겠다는 것일까요? 세상의 일체 중생, 고뇌에 시달리는 일체 중생을 모두 구해 멸도시키겠다는 것입니다〔我應滅度一切衆生〕.

멸도(滅度)란 무엇일까요? 고통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게 하여 열반에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소위 열반의 경계라는 것은 고통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는 것으로서, 멸도는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멸도를 목을 쳐서 죽인다는 뜻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건 곤란합니다! 멸도란 열반을 번역한 것으로서 어떤 상태, 즉 적멸(寂滅)의 청정한 경계로 들어가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바로 고개를 돌리면 곧 피안이라고 하는 그 '피안' 입니다. 이 경계 역시 일체의 고통을 벗어나는 것으로서, 여기에 이르면 더 할 수 없는 즐거움을 얻게 됩니다. 불법을 배우고자 하는 제1의 동기는 바로 이런 마음을 갖기 위함입니다.

그 다음은 일체 중생을 제도하면 그만일 뿐, 실제로 어떤 중생도 제도한 자가 없다〔滅度一切衆生已, 而無有一衆生實滅度者〕”라는 것으로, 일체 중생을 멸도시켰다 하더라도 마음속으로 내가 이미 저 많은 사람을 멸도시켰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든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부처는 말합니다. 인생의 이치를 잘 이해한다면, 불법을 배우려는 사람은 일체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발심(發心)을 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일체 중생을 구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마음속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도요, 보살의 발심입니다. 만약 오늘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서 그것을 마음에 새겨 그 사람에게 감사를 바란다면 그걸로 끝장입니다. 그러고서는 불법을 배워도 잘 안 된다느니, 처세조차도 잘 안 된다느니 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러므로 불법을 배우는 사람은 이렇게 발심해야 합니다.

“무엇 때문인가?” 부처는 수보리에게 말합니다. “불법을 배우고 보살도를 닦으려는 사람에게 스스로 숭고하다거나 위대하다거나 훌륭하다거나 하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는 이미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에 집착한 것이다.” 부처는 말합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이미 끝난 것이다! 즉 보살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불법을 배우는 사람이라 할 수 없으며, 진정으로 보살도를 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중국 문화에서도 역시 대 공무사(大公無私), 즉 무아상(無我相) ·무인상(無人相) ·무중생상(無衆生 相) · 무수자상(無壽者相)을 말합니다. 천하의 창생을 모두 구하면서도 마음속에 어떤 것도 남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대공무사요, 보살 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보살이 아니라고 부처는 말합니다.


연등불에게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왜 그런가 하면 수보리여! 실로 아누다라삼막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킬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다.”

所以者何? 須菩提! 實無有法,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소이자하 수보리 실무유법 발아두다라삼막삼보리심자

“무슨 이유 때문인가?” 부처가 수보리에게 말합니다. “그대들은 날이면 날마다 오도(悟道)니 명심견성(明心見性)이니 대철대오(大徹大悟)니 하는 것들을 바라지만, 내가 그대들에게 이르노니 어떤 법(法)도, 어떤 것도 도(道)라 부를 만한 것이 없다!” 대철대오란 곧 어떤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 닫는 것입니다. 배울 만한 법이 있다거나 얻을 만한 도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미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에 사로잡힌 것으로, 보살이 아닙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여래가 연등블 계시던 곳에서 어떤 법이 있어 아누다라삼막삼보리를 얻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於然燈佛所, 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
수 보리 어의운하 여래어연등불소 유법득아두다라삼막삼보리부 
不也, 世尊!”
불야 세존

부처가 수보리에게 묻습니다. “내가 이전에 연등불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대는 한번 생각해 보게나. 그때 내가 진정 어떤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는가? 진정 아누다라삼막삼보리에는 크고 작음이 있겠는가?” 이 아누다라삼막삼보리란 도대체 어떤 것이겠습니까? 부처는 말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게, 내가 진정 어떤 것을 얻었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는 아주 간절하게 대답합니다. “제가 알기로 깨달음을 얻으시던 그때 부처께서는 아무것도 얻으신 바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깨달음입니다.

“제가 부처님 말씀을 이해한 바로는, 부처께서 연등불 계시던 곳에서 아무 법도 없이 아누다라삼막삼보리를 얻으셨습니다.”

如我解佛所說義, 佛於然燈佛所, 無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여아해불소설의 불어연등불소 무유법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

수보리가 말합니다. “만약 제가 이해한 것이 틀리지 않다면, 제가 그렇게 오랫동안 부처를 모시면서 부처께서 설하신 불법을 잘 이해한 바에 의하면, 연등불과 함께하시던 그때 부처께서는 아누다라삼막삼보리니 대철대오니 하는 것들을 결코 얻으신 적이 없습니다.” 수보리의 대답은 아주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수보리는, 자기가 아직 도(道)를 증득하지 못했기에 자신의 견해는 이러한데 과연 그러한지를 되묻습니다.

부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바로 그렇다!”

佛言,“如是! 如是!
불언 여시 여시

부처가 대답합니다. “바로 그렇다! 바로 그렇다! 〔如是! 如是!〕” 그렇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여러분이 진정 선종을 배우고자 한다면, “여시! 여시!〔如是! 如是!〕”가 바로 화두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들고 수행해서 통하기만 하면 됩니다. 날마다 “여시! 여시!”만 붙들고 있으면 됩니다. 그렇지만 유여시(柳如是)를 붙들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유여시는 명나라 말엽의 이름난 기생으로, 성(姓)이 유(柳) 씨인데 이름은 『금강경』의 여시(如是)'에서 따온 것입니다. “여시”란 부처가 말한 것입니다. 부처는

"수보리여! 실로 아무 법도 없이 여래는 아누다라삼막삼보리를 얻었다.”

須菩提! 實無有法,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 실무유법 여래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

분명하게 말씀드리자면 진정한 불법은 결코 어떤 고정된 것이 아닙니 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고정된 것을 얻었다면,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 실제로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체 또한 없으며, 감각조차도 없습니다.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이니 빛도 없고 색깔도 없으며, 일체가 모두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수보리여! 만약 어떤 법이 있어 여래가 아누다라삼막삼보리를 얻었다면, 연등불께서 나에게, 그대는 내세에 마땅히 부처가 되어 석가모니라 불릴 것이라고 수기를 내리시지 않았을 것이다.”

須菩提! 若有法,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 然燈佛卽不與我授記.
수보리 약유법 여래득아누다라삼막삼보리자 연등불즉불여아수기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釋迦牟尼.
여어내세 당득작불 호석가모니

부처가 말합니다. “가령 불법이 최고도에 이르러 어떤 법을 얻을 수 있었다면, 다시 말해 내가 도를 깨쳤을 때 어떤 것을 얻을 수 있었다면, 내 스승이었던 연등불께서 내가 장래의 세상에서 대철대오할 것이라 말하며 그 자리에서 수기(授記)를 내리시지 않았을 것이다!”

수기란 불교 용어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옛 부처들은 제자가 도를 깨지 면 그 앞에 서서 소위 관정(灌頂)이라 하여 정수리를 어루만지면서 수기를 내립니다. 이는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얼마만큼의 세월이 흐른 후 그대는 어떤 세계에서 성불할 것이다. 이렇게 밝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기입니다.


연등불이 왜 수기했을까

실로 어떤 법도 없이 아누다라삼막삼보리를 얻었기 때문에 연등불께서 나에 게 수기를 내리시면서, 그대는 내세에 마땅히 부처가 되어 석가모니라 불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以實無有法,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是故然燈佛, 與我授記, 作是言,
이실무유법 득아두다라삼약삼보리 시고 연등불 여아수기 작시언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釋迦牟尼.
여어내세 당득작불 호석가모니

석가모니가 연등불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실제로 그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등불이 당시 그에게, “그대는 장래에 사바세계에서 성불할 것이니, 명호(名號)를 석가모니라 할 것이다” 라고 하면서 수기를 내린 것입니다. 우리는 늘 이렇게 말합니다. “무언가를 얻으려는 마음으로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는 열매를 구하지 마라! 〔不要以有所 得之心, 求無所得之果〕 여러분은 불법을 배우면서 모두 무언가를 얻으려는 마음을 갖고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는 열매를 구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착오입니다. 부처는 말합니다. "당시 나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는 경계를 얻었기에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고, 그래서 연등불께서 나에게 수기를 내리신 것이다.” 좋습니다. 이제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왜냐하면 여래란 곧 모든 법과 같기 때문이다.”

何以故? 如來者, 卽諸法如義. 
하이고 여래자 즉제법여의

이것이 핵심입니다! 불법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합니다! 우리 불법을 배우는 사람들은 모두 불상 앞에서 절을 합니다. 매일 절을 하면서 여래께서 우리를 돌봐 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부처를 여래(如來)라고도 하는데, 왜 한문으로 여래(如來)라고 번역했을까요? 이 번역은 참으로 묘합니다. 여래(如來)란 올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如)'는 무엇과 같다는 뜻이니, 여래(如來)는 올 것 같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텔레비전을 볼 때 나오는 스타는 우리 앞에 온 것일까요, 아닐까요? 실제로 그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래(如來)입니다. 마치 와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전화를 걸 때 상대는 여러분의 귓전에 와 있는 것일까요? 그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래(如來) 입니다. 마치 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래는 어디에 있을까요? 부처는 어디에 있을까요? 부처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처를 다른 데서 찾을 필요 없습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의 몸과 마음 안팎에 수시로 부처가 있습니다. 스스로 찾아낼 수만 있다면 곧 부처를 볼 수 있습니다. 여래 또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여래란 곧 모든 법과 같다〔如來者, 卽諸法如義〕, 이 구절이 가장 중요합니다. 불법을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합니다. 불법을 배우는 사람은 누구든 종교성을 띠게 됩 니다. 부처가 어디에 있습니까? 부처는 불당에 있습니다. 부처가 어디에 있습니까? 부처는 절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처가 서쪽 하늘〔西天〕에 있다고도 합니다. 이건 엉터리입니다. 부처가 어디에 있습니까? 부처는 바로 여러분이 있는 그곳에 있습니다. 세상의 일체 법이 모두 불법〔佛法〕으로서 어떤 법도 불법 아닌 것이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법도 『중용』에서 말하 듯, “부부의 어리석음으로도 그것을 알 수 있는〔夫婦之愚, 可以與知〕”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래로서, 누구든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때 어느 곳이든, 어떤 티끌 속이든, 깨끗한 곳이든 더러운 곳이든, 부처는 도처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래입니다. 이 때문에 “제법여의(諸法如義)”라고 한 것입니다. 이 점을 특별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누다라삼막삼보리를 얻었다 말하더라도, 수보리여! 실로 어떤 법도 없이 부처는 아누다라삼막삼보리를 얻었다.”

若有人言, 如來得阿婦多羅三藐三菩提, 須菩提! 實無有法,
약유인언 여래득아누다라삼막삼보리 수보리 실무유법 
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불득아누다라삼막삼보리

부처는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보리수 아래에 일곱 날을 있으면서 도(道)를 이루어 아누다라삼막삼보리를 증득했다고 말한다. 수보리여! 그대에게 말하지만 진정으로 개오(開悟)한 그날, 나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철대오(大徹大悟)라 하고, 오도(悟道)라 한다.”

“수보리여! 여래가 얻은 아누다라삼막삼보리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지만 공허한 것은 아니다.”

須菩提! 如來所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於是中無實無虛.
수보리 여래소득아누다라삼막삼보리 어시중무실무허

이것도 얻을 것이 없다면 무엇 하러 불법을 배웁니까! 우리 자신 또한 본래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모두 불법을 배우는 것이 공(空)을 배우는 것이라 말하니, 여러분도 그렇게 머리를 써 가며,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머리를 써 가며 생각해야 한다면, 공을 배울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본래 공입니다! 굳이 쫓아다니며, 공을 찾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 불법이 유(有)를 배우는 것이라 한다면 쫓아다니며 이것저것 배우는 것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만, 공(空)을 배우기 위해 그렇게 먼 길을 쫓아다니고 산 위로 올라가며 절까지 가서 찾으니 그 절 역시 공은 아닐 겁니다! 공을 배우면서 그렇게 찾아다닐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본래가 바로 공입니다. 그렇지만 부처는 말합니다. 공(空)을 배우는 것도 아니요, 유(有)를 배우는 것도 아니라고요. “무실무허(無實無虛)”, ‘무실(無實)'은 곧 공(空)이요 무허(無虛)'는 곧 유(有) 입니다. 바로 다른 경전에서 말하는 “비공비유(非空非有)” “즉공즉유(卽空卽有)” 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이런 표현을 쓰지 않 았을 뿐입니다.


일체가 모두 불법이다.

"이런 까닭에 여래는, 일체의 법이 모두 불법이라 말하는 것이다.”

是故如來說一切法, 皆是佛法.
시고여래설일체법 개시불법

일체의 법이 모두 불법(佛法)입니다. 어떤 법도 불법 아닌 것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불법을 배운 후 너무 옹졸해져서 오직 부처에 귀의할 뿐 사마외도〔邪魔外道, 정당하지 못한 길〕는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제가 언제가 시골에 갔을 때 토지묘(土地廟) 하나를 보았는데, 진흙으로 빚은 토지고(土地公)이 모셔져 있길래 공손히 절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저에게 당신은 불법을 배우는 사람인데 어째서 절까지 하느냐고 했습니다. 저는 그런 것은 상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살아서 좋은 사람이었으니 주어서도 토지공이 된 게 아니겠습니까? 저야 반드시 좋은 사람이라고는 한 수 없으니 죽어서 그 토지공이 저를 관리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 러니 미리 좋은 인연이라도 맺어 두는게 아무래도 낫겠지요! 여러분이 불법을 배우고 삼보(三寶)에 귀의하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자신이 바로 살아 있는 보물〔活寶〕입니다! 이건 농담이 아닙니다.

진정한 불법은 세속적인 것이든 탈속적인 것이든 일체를 공경하는 것입 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의 정신입니다. 부처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단지 바르게 배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칠 뿐입니다. 부처는 경전에서 말합니다. “일체의 성현은 모두 무위로 법을 삼으나 차별이 있다〔一切賢 聖, 皆以無爲法, 而有差別〕” 라고요. 여기서는 다시 말합니다. 일체의 법이 모두 불법이다〔一切法, 皆是佛法〕”라고요. 바로 부처가 한 말입니다! 제가 한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종교 저 종교, 이 파(派) 저 파를 따지는 옹졸한 마음으로는 근본적으로 불법을 배울 수 없습니다.

저는 기독교 예배당에 가서도 마찬가지로 공경을 다합니다. 예수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입니까? 예수는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유럽인이든 미국인이든 백인종이든 모두 좋은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훌륭한 분이시여! 자, 여러분! 줄 맞춰 앉으시고, 위로 올라앉으십시오. 과일도 좀 드십시오. 자, 여러분! 인사드립시다. 예수의 나이는 우리보다도 훨씬 많습니다. 천 살도 더 많습니다! 불법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제일 먼저 가슴이 넓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불법을 배우는 사람은 먼저 항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보살의 크나큰 도량부터 배워야 합니다. 배포를 좀 더 키워서 만상(萬象)을 포용해야 합니다. 무엇이든 다 좋고, 무엇이든 다 옳습니 다. 일체의 법이 모두 불법입니다. 먼저 부처의 가슴부터 배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대하더라도 항시 자비로운 미소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 이 바로 불법입니다.

“수보리여! 일체의 법은 일체의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름이 일체의 법이다.”

須菩提! 所言一切法者, 卽非一切法, 是故名一切法.
수보리 소언일체법자 즉비일체법 시고명일체법

부처는 다시 한 번 뒤집습니다! 무엇을 일체의 법이라 하는가? 일체의 법은 모두 공(空)이다! 우리는 방금 말했습니다. 그에게 공경을 표할 뿐이라고요. 공경을 표하는 것 역시 공입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은 일체의 법이 아닙니다. 이것은 관념상의 문제입니다. 관념상으로는 하나의 법이 있다고 하면 곧 있는 것이고, 공이라 하면 곧 공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일체의 법은 일체의 법이 아니요, 그러므로 이름이 일체의 법이다〔所言一 切法者, 卽一切法,是故名一切法〕”라고 한 것입니다.


어떤 것도 없는 보살

“수보리여! 비유컨대 사람의 몸이 큰 것과 같다.”
이 수보리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몸이 크다고 하면 큰 몸이 아니며, 그것의 이름이 큰 몸입니다.”

須菩提! 譬如人身長大
수보리 비여인신장대 
須菩提言, 世尊! 如來說人身長大, 卽爲非大身, 是名大身.
수보리언 세존 여래설인신장대 즉위비대신 시명대신

부처는 수보리에게 묻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키도 아주 크고 몸집도 장대하다면〔譬如人身長大〕”, 부처가 이렇게 말을 꺼내자 수보리가 곧이어 대답합니다. “알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 어떤 사람이 키가 크고 몸집이 장대하다는 것은 실제로 그 사람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크고 장대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부처는 수보리의 말을 듣고서 다시 말합니다.

“수보리여! 보살 또한 이와 같다. 만약 내가 마땅히 무수한 중생을 제도하리라 하고 말한다면 보살이라 할 수 없다.”

須菩提! 菩薩亦如是. 若作是言, 我當滅度無量衆生, 卽不名菩薩.
수보리 보살역여시 약작시언 아당멸도무량중생 즉불명보살

"그렇다네.” 부처는 수보리의 대답이 옳다고 하고서 불법을 배우는 사람 역시 그래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령 불법을 배우는 사람이 다가와서 한참을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외고서는 “자, 절하시오! 나에게 고마워해야 합니다! 내가 그대를 위해 염불하여 그대를 제도하리라!”, 이렇게 말한다면 이 사람은 보살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를 염두에 둘 필요도 없습니다. 그의 불법은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보살도를 행하고 중생을 구제하며 다른 사람을 돕는 사람에게는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제도 한다는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만약 그런 생각이 있다면 이미 계(戒)를 범한 것입니다. 보시의 계를 범한 것입니다. 절대 이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천하의 중생을 모두 제도하고 천하의 창생을 모두 구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속에 조금도 사사로운 생각이 없으며, 조금도 자기가 숭고하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실로 아무것도 없는 것을 일러 보살이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부처는, 일체의 법에 아 · 인 · 중생 · 수자가 없다고 말한다.”

何以故? 須菩提! 實無有法名爲菩薩. 是故佛說一切法,
하이고 수보리 실무유법명위보살 시고불설일체법
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

진정한 대보살은 부처와 마찬가지로 결코 어떤 것도 얻는 바가 없습니 다. 그에게 법보(法寶)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이며 공리주의적 관점입니다. 그를 왜 보살이라 하겠습니까? 그가 변화무쌍하고 광대하며, 일체의 것에 집착하지 않고, 일체의 것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보살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습니다.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내가 마땅히 장엄한 불토를 가진다고 말한다면, 이를 보살이라 부르지 않는다.”

須菩提! 若菩薩作是言. 我當莊嚴佛土, 是不名菩薩. 
수보리 약보살작시언 아당장엄불토 시불명보살

부처는 수보리와 동일하게 말합니다. 가령 불법을 배우는 사람이, 내가 만약 성불한다면, 내 불국천당(佛國天堂)은 지금의 일류 관광호텔보다도 더 멋있을 것이다! 아미타불의 국토라 하더라도 이보다는 못할 것이다!” 하고 말했다고 합시다.

불경에서는 유리로 바닥을 만들었다고 하니 아마도 대리석으로 만든 것 만큼 아름답지는 못할 겁니다. 불경에서 말하는 칠보행수〔七寶行樹, 극락 정토를 뒤덮고 있는 칠보로 된 나무. 이 나무는 순금, 백은, 유리, 수정, 호박, 옥, 마노중 한 가지 보물로 된 것도 있고 여러 보물로 이루어진 것도 있음. 나무가 반듯하게 정 돈되어 있어서 장엄의 극치를 이루며, 바람이 불면 아름다운 소리가 나서 어떤 음악도 이에 비할 바가 없다고 함〕라도, 현대 과학을 이용해 꾸며 놓는다면 그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가령 내가 성불했다면, 반드시 아미타불의 국토보다도 더 아름답게 만들어서 아미타불을 모셔다 놓고 한번 비교해 볼 겁니다.

어떤가요? 이것이 보살심이겠습니까? 이런 것은 보살심이 아닙니다. 여기서 부처는 성불하면 어떤 사람이라도 모두 그의 불국(佛國)을 갖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소위 “장엄불토(莊嚴佛土)”란 물질적으로 장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장엄한 것입니다. 마음이 선하고, 공덕이 원만하며, 생각이 청정해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장엄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장엄한 것에 대한 어떤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보살심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래가 말하는 장엄한 불토는 장엄한 것이 아니라 이름이 장엄이다.”

何以故? 如來說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하이고 여래설장엄불토자 즉비장엄 시명장엄

부처가 말한 “장엄불토” 란 형용하는 말일 뿐입니다! 우리 도시를 한번 보십시오. 과학이 발달하면서 건물도 얼마나 아름다워졌습니까! 그렇지만 어느 날 허공의 정상에 이르러 아무것도 볼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빈 것 (空)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우며 진정 장엄하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겁니다.

철저한 공(空)이야말로 진정 장엄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장엄한 것으 어이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진정 장어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는 말합니다. “장엄한 불토는 장엄하지 않으며 그 것의 이름이 장엄이다〔如來說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무아의 보살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무아법에 통달했다면, 여래가 말한 이름은 진정으로 보살일 것이다.”

須菩提! 若菩薩通達無我法者, 如來說名真是菩薩.
수보리 약보살통달무아법자 여래설명진시보살

이것이 불법을 배우는 첫걸음이자 결론이기도 합니다. 먼저 무아(無我) 를 통달해야 합니다. 어떤 것이 무아일까요? 먼저 신견(身見)을 버려야 합 니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불법을 배우려고 타좌를 하면서도 정(定)을 얻지 못합니다. 바로 신견 때문입니다. 신체의 감각이 있고 신체에 대한 생 각이 있으며, 여기에다 신체 내의 기맥(氣脈)이니 임독(任督) 2맥이니 전전후전(前轉後轉)이니 단전(丹田)이니 하며 온갖 것에 정신이 쏠립니다. 이것들은 모두 자기만의 꿍꿍이속으로 바로 신견입니다.

 

 글은 남회근 선생의 '금강경 강의'에서 참조하고, 인용 했습니다.

'붓다경전 > 금강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강경 제20품 이색이상분  (0) 2022.05.23
금강경 제18품 일체동관분  (0) 2022.05.22
금강경 제16품 능청업장분  (0) 2022.05.20
금강경 제15품 지경공덕분  (0) 2022.05.20
금강경 제14품 이상적멸분  (0) 2022.05.1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