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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경전/금강경

금강경 제18품 일체동관분

by 파장波長 2022. 5. 22.

제18품 일체를 똑같이 보다

 

18· 一體同觀分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肉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肉眼.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육안부? 여시! 세존 여래유육안.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天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天眼.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천안부? 여시! 세존 여래유천안.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慧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慧眼.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혜안부? 여시! 세존 여래유혜안.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法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法眼.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법안부? 여시! 세존 여래여래유법안.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佛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佛眼.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불안부? 여시! 세존 여래유불안.

須菩提! 於意云何? 如恒河中所有沙, 佛說是沙不? 如是! 世尊! 如來說是沙
수보리! 어의운하? 여항하중소유사 불설시사부? 여시! 세존! 여래설시사

須菩提! 於意云何? 如一恒河中所有沙, 有如是沙等恒河
수보리! 어의운하? 여일항하중소유사 유여시소등항하
是諸恒河, 所有沙數, 佛世界如是, 寧爲多不?” “甚多! 世尊!
시제항하 소유사수 불세계여시 영위다부? 심다! 세존! 
佛告須菩提,爾所國土中, 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悉知,
불고수보리 이소국토중 소유중생 약간종심 여래설지

何以故?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是名爲心,
하이고? 여래설자심 개위비심 시명위심

所以者何? 須菩提!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소이자하? 수보리!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부처의 다섯가지 마음의 눈 오안(五眼)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여래에겐 육안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선 육안을 갖고 계십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여래에겐 천안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선 천안을 갖고 계십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여래에게 혜안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선 혜안을 갖고 계십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여래에게 법안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선 법안을 갖고 계십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여래에게 불안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선 불안을 갖고 계십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肉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肉眼.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육안부? 여시 세존! 여래유육안.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天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天眼.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천안부? 여시! 세존! 여래유천안.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慧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慧眼.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혜안부? 여시! 세존! 여래유혜안.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法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法眼.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법안부? 여시! 세존! 여래유법안.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佛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佛眼.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불안부? 여시 세존! 여래유불안.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오안(五眼), 즉 다섯 종류의 눈에 대한 것으로 거의 같은 문장이 반복됩니다. 여기서는 부처가 먼저 묻습니다. “그대 생각은 어떤가? 부처는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을 갖고 있겠는가?” 여기서는 ‘부처' 라는 말 대신 여래(如來)'를 사용합니다. 여래라는 말은 형이상적 도()의 본체를 가리킵니다. 일체 중생도 여러 부처나 보살처럼 심성(心性)의 본체를 지니는데, 이것은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부처는 이 생명의 근원 속에 내재된 다섯 가지 기능을 오안(五眼)이라 말합니다.

이어보기 붓다의 다섯 가지의 눈 오안(五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주 세계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갠지스 강의 모든 모래를 부처는 모래라 말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선 그것을 모래라 하셨습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恒河中所有沙, 佛說是沙不?
수보리! 어의운하? 여항하중소유사, 불설시사부?
如是! 世尊! 如來說是沙. 
여시! 세존! 여래설시사.

부처의 눈은 육안, 천안, 혜안, 법안, 불안으로 나타납니다. 이 때문에 부처는 이 세상에, 이 허공 중에 그렇게 많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천문학이나 우주 과학이 발전하면서 우주에는 수없이 많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이제는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단지 우선은 믿는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과연 달에 생명체가 있는지에 대해서조차도 아직은 확정적으로 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이야 우주에 대해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부처의 이 말이 이천 년도 훨씬 전에 한 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가 무슨 도구나 방법을 사용해서 우주 중에 이토록 많은 세계와 중생이 있다는 것을 알았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여래가 구비했다고 하는 오안(五眼), 지혜, 신통 같은 능력에서 나온 것입니다. 부처는 이처럼 불가사의한 능력을 구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가장 평범한 수준으로 끌어내려 중생과 평등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부처가 본 세계는 모래는 모래요. 물은 물이었습니다. 산을 보니 산이 아니요 물을 보니 물이 아니다. 이런 소리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소리를 한다면 정신병자입니다! 만약 뒤통수를 호되게 한 방 얻어맞았다면 당연히 눈앞이 오락가락하면서 사람을 봐도 사람이 아니요, 귀신을 봐도 귀신이 아니겠지요! 그러나 이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무엇을 보더라도 있는 그대로 보일 겁니다.


너의 마음

“왜냐하면 여래가 말한 모든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何以故?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是名爲心.
하이고? 여래설제심, 개위비심, 시명위심.

부처의 눈으로 볼 때 모든 중생의 마음은 “모두 마음이 아닙니다〔皆爲非心〕.” 부처는 사람들을 나무라고 있습니다. 중생의 심리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마음이란 것 또한 없다는 겁니다. 마음은 어디로 가 버렸을까요? 마음이 없어져 버렸으니 "비심(非心)”, 근본적으로 마음이 아닙니다. 이미 마음이 아니라면, 그건 또 뭐란 말입니까? 부처는 아마도 우리가 이렇게 물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곧 이어서 말합니다. 내 눈으로 볼 때 그건 마음이 아니며,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이라 부른다!" 부처는 말합니다. “세상 일체 중생의 마음을 내가 모두 안다.” 수보리가 미처 묻기도 전에 그는 다시 말합니다. “일체의 사람 마음은 모두 마음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일체 사람의 마음이 '인심(人心)'이 아니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았습니다. 중생의 마음은 '인심'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개든 소든 개미든 작은 곤충이든 이들 일체 생명의 마음은 모두 마음이 아니며, 그것의 이름이 마음이라는 것입니다〔皆爲非心, 是名爲心〕. 『금강경』은 처음부터 일체의 중생이 '아집'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중생이며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나' 라는 현상에 너무도 집착합니다. 또 나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모든 망상과 분별 의식, 번뇌 등 일체의 실재하지 않는 이런 것들을 지시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람은, 또 일체 중생은 근본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체 생각이나 심리, 의식의 변화는 모두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일종의 변화 현상일 뿐 진정한 마음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일체 중생은 이 변화에 사로잡혀 이것을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영원히 얻을 수 없는 마음

"왜냐하면 수보리여! 과거의 마음은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所以者何? 須菩提!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소이자하? 수보리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앞 구절의 결론은 부처 자신이 제기한 마음의 문제, 그의 눈으로 본 마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결론은 일체가 마음이 아니라는 것이었습 니다. 중생의 일체 마음은 모두 변화 중에 있으며, 그것은 시간이나 물리 세계와 마찬가지로 영원히 멈추지 않고, 영원히 파악할 수 없으며, 영원히 과거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마음은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 不可得〕"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미래라고 말하자마자 그것은 현재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현재라고 말하자마자 곧 과거가 됩니다. 이 현상은 붙들 수 없는 것으로, 일체의 감각과 지각이 모두 그러합니다. 그렇지만 중생은 이 이치를 이해하지 못해 한사코 얻을 수도 없는 과거와 현재, 미래에 머물고자 하며, 그것을 붙들어 두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불법을 공부하는 분들은 특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타좌시 마음을 정()에다 붙들어 두고자 하지만, 이것 역시 착오입니다.

마음을 정()에 머물게 하려고 하지만 참선과 기도를 끝내고 나면 그것은 이미 달아나 버립니다. 그러니 어디에다 머물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 참선과 기도로 아주 청정해진 것 같다고요? 그러면 뭘 합니까? 끝나고 나면 곧 사라지고 말 텐데요. 과거도 얻을 수 없고, 현재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도 얻을 수 없습니다. 누가 청정이 지속되도록 해 줄 수 있겠습니까? 청정도 얻을 수 없고, 번뇌도 얻을 수 없으며, 얻을 수 없는 것 또한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얻을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얻는 것입니다. 이처럼 평범합니다.

『금강경』을 해석하면서, 반야가 공()이므로 얻을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주 비관적입니다. 공은 얻을 수 없는 것이기에 공이 아닙니다. 공은 부단히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부처는 세상의 일체 것이 모두 유위법(有爲法)이라 말합니다. 유위법은 모두 실재하지 않습니 다. 유위법의 본체는 무위(無爲)이며, 유위(有爲)는 그 작용입니다. 이처럼 유위는 도()를 신고 달리므로, 우리는 유위법 속에서 무위의 도를 구해야 합니다. 일체의 수지(修持)는 모두 작용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유위법을 단절시킨 후에야 도를 증득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 다. 유위법은 본래 무위 가운데 있는 것이므로, 무위의 도는 유위의 현상 속에서 관찰해야 합니다. 이렇게 뚜렷이 관찰할 수 있어야 비로소 도를 볼 수 있습니다.

유위법은 끊임없이 생겨나므로 유위에는 한계가 있을 수 없으며, 생멸(生滅) 또한 없어지지 않습니다. 생멸하는 마음을 단절해 버려야 도를 증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사견(邪見) 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불법이 아닙니다. 소위 말하는 연기성공(緣起性空), 성공연기(性空緣起)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금강경의 핵심 중 핵심입니다. 이 점을 뚜렷 하지 않으면 전체 불법이 사견(邪見)이 되고, 단견(斷見)이 되고 맙니다. 이런게 되면 유물론처럼 공()을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 여기게 되니, 이건 불법이 아닙니다!

부처는 과거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고 했지, 과거의 마음이 없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처는 과거의 마음을 얻는 것이 불가(不可) 하다고 했는데, ‘불가(不可)'는 일종의 방법상의 추단(推斷)입니다. 부처는 결코 과거와 현재 및 미래의 마음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不能〕 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한 글자의 차이는 아주 큽니다. 그렇지만 우리 후세의 불교 연구자들은 ‘불가(不可)'를 '불가능(不可能)이라 생각합니다. 이건 착오 중에서도 정말 큰 착오입니다. 그래서 부처는 과거의 마음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현상계 속에서 무상(無上)의 아누다라삼막삼보리, 즉 무 상의 도심(道心)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현상의 세 마음은 모두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글은 남회근 선생의 '금강경 강의'에서 참조하고, 인용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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