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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경전/금강경

금강경 제20품 이색이상분

by 파장波長 2022. 5. 23.

제20품 형체를 떠나고 상을 떠나다.

 

第20品·離色離相分 

須菩提! 於意云何? 佛可以具足色身見不?
수보리! 어의운하? 불가이구족신상견부?
不也, 世尊! 如來不應以具足色身見. 何以故? 如來說具足色身, 卽非具足 
불야 세존 여래불응이구족색신견 하이고? 여래설구족색신 즉비구족
色身, 是名具足色身.
색신 시명구족색신.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可以具足諸相見不?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가이구족제상견부? 
不也, 世尊! 如來不應以具足諸相見. 何以故? 如來說諸相具足, 卽非具足,
불야, 세존! 여래불응이구족제상견, 하이고? 여래설제상구족, 즉비구족,
是名諸相具足.
시명제상구족.


대장부 상(相)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부처를 색신을 다 갖춘 존재라 볼 수 있는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색신을 다 갖춘 존재라 보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색신을 다 갖추었다고 하시는 것은 색신을 다 갖 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일러 색신을 다 갖추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佛可以具足色身見不?
수보리! 어의운하? 불가이구족색신견부? 
不也, 世尊! 如來不應以具足色身見, 何以故? 如來說具足色身, 
불야 세존! 여래불응이구족색신견, 하이고? 여래설구족색신, 
卽非具足色身, 是名具足色身.
즉비구족색신, 시명구족색신이.

『금강경』 상반부는 모두 수보리가 제시한 문제와 그에 대한 부처의 대답 이었습니다. 하반부에 이르면 부처 자신이 말하며, 수보리가 이해하지 못 알까 봐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습니다. 『금강경』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부처가 식사를 하고  난 뒤 타좌하면서 휴식을 취하려 하는데, 수보리가 눈치 없이 한사코 문제를 들이댑니다. 그러자 부처는 자비심이 일어  하나하나 찬찬히 설명합니다.  앞에서 이미 한 단계 한 단계씩 말했지만, 삼십이상(三十二相)은 모두 여래가 아니며, 만약 모든 상諸相이 상(相)이 아님을 본다면 여래를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부처는 이어서 세세하고 자비롭게, 혹 이해하지 못할까 봐 반복해서 이것을 설명합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부처를 색신을 다 갖춘 존재라 볼 수 있는가?〔佛可以具足色身見不〕” 여기서는 '여래(如來)' 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부처〔佛'라고 표현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여래라 표현하고 어떤 곳에서는 부처라 표현하고 있는데, 한 글자 한 글자도 모두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금강경』을 읽어도 헛읽는 겁니다.

여기서의 '부처〔佛〕는 보신(報身), 즉 육신(肉身)을 나타냅니다. 부처의 보신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십이 년이나 굶었어도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부처는 미남이었습니다. 삼십이상, 팔십 종(種)의 뛰어난 점이 있었습니다. 아난은 부처에게 한 차례 꾸지람을 듣긴 했지만, 부처의 아름다움에 반해 부처를 따라 출가했다고합니다. 아난의 출가는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위해서였다는 겁니다. 부처는 이처럼 색신을 두루 갖추고 있었습니다. 대장부 상(相)을 갖고 있어 보통 사람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삼십이상을 지녔을 뿐 아니라 그것에 수반된 팔십 종의 좋은 점을 갖추었는데, 이것은 보통 사람에게는 없는 특징입니다. 이것을 일러 “색신을 두 루 갖추었다〔具足色身〕”라고 합니다.

사람이 성불할 때는 대장부 상을 갖추어야 합니다. 불경의 아주 많은 곳에서 대장부 상을 찬탄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불경의 아주 많은곳에서 여성이 성불하려면 반드시 남자의 몸으로 바뀌어 대장부 상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몇 권의 대승 경전에서 부처도 한 방 얻어맞습니다. 그가 하상녀(河上女)와 승만 부인(勝臺夫人)을 만났을 때입니다. 이들 두 사람은 모두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았는데도 즉신성불(卽身成佛)했습니다. 이들이 부처 면전에서 한 차례 이야기하자 부처는, “여시! 여시(如是! 如是!)” 라고 하며 옳다고 수긍합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분별상도 었으니 여성 역시 성불할 수 있으며, 남자의 몸으로 전환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소승의 지견(知見)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금강경에서도 부처는, 여성은 성불할 수 없다는 설법을 뒤집고 있습니다. 부처를 과연 색신(色身)을 두루 갖춘 존재로 보아야 할까요? 삼십이상을 보면 그 모습이 당당한데, 이것을 부처라 해야 할까요? 수보리가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라고 모든 상을 다 갖추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如來不應以具足色身見〕.”


세상의 육신보살

득도한 사람은 자연 도(道)의 상(相)을 갖지만 이것은 구체적인 모습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륙에서, 성취를 얻은 어떤 스님을  육신보살(肉身菩薩)이라고 부르지만, 어떤 사람은 그를 육신 나한(肉身羅漢)이라고도 했습니다. 얼굴은 정말 못생겼습니다. 두 눈은 구리종보다 크고 번들거렸으며, 근시라 안경까지 끼고 있었으니 참으로 괴상했지요. 코는 통마늘만큼 컸고, 입은 귀 언저리까지 찢어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빨은 옥수수처럼 촘촘하고 작았습니다. 오관을 하나하나 뜯어 보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보면 볼 수록 귀엽기도 하고 장엄하기도 했습니다. 뒤뚱거리며 걷는데도 아주 장엄하게 느껴졌습니다. 옷은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갈아입지 않아 온몸에 이가 득실거렸고, 가려우면 이렇게 박박 긁어 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기어 나온 이를 발견하면 살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괴인이었습니다.

이 밖에도 티베트에서는 활불(活佛) 라마 한 명이 있었는데, 그는 차 마시기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한인(漢人)들이 이곳에다 파는 차는 모두 싸구려 차인데, 그는 여기다 수유(酥油, 소젖을 바짝 졸여 만든 기름, 티베트 사람들이 애용함)를 넣은 소위 수유차를 즐겼습니다. 반은 기름이고 반은 차인데, 습관이 되면 맛이 꽤 괜찮습니다. 그에게는 바리때가 하나밖에 없었는데, 밥을 먹을 때나 차를 마실 때나 손님을 맞아 대접할 때나 그것을 사용했습니다. 그건 수십 년 동안 역시 한 번도 씻지 않아 더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신통력이 있는 그를 가끔 찾아가기도 했는데, 그럴 때 그는 인연이 있다고 생각하여 대접하고픈 손님에게는 자기가 차를 마시던 그 바리때를 건네며 한 모금 마시라고 권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더러워서, 어떤 사람은 황송해서 감히 마시지 못합니다. 더러워하는 황송해하든 그는 모두 알아챕니다. 황송해할 때는 억지로 한 모금 마시도록 하는데, 그가 마시던 차를 한 모금 마시면 많은 죄업이 소멸된다고 전해집니다. 어떤 사람은 더럽게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러면 여지없이 나무랍니다. 당신 입도 살이고 내 입도 살인데, 왜 이 그릇을 꺼리지? 이런 사람들은 자세히 보면 아주 장엄합니다. 이 장엄함은 코에 있는 것도 아니요, 눈에 있는 것도 아니며, 오관 어디에도 있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도(道)의 기운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성불한 사람을 “구족색신(具足色身)”으로 보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신체상에서 도(道)를 찾으려 해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당연한 일이지만, 득도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기질의 변화가나 타납니다. 육신에 반드시 변화가 생긴다는 겁니다. 절로 도의 기운이 갖추어져 그 모양이 아주 장엄합니다. 그렇지만 “즉비구족색신〔非具足色身〕” 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상(相)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이 육체는 여전히 생멸합니다. 이 때문에 이름이 “구족색신” 입니다. 주의할 것은, 이 “구족색신” 이 육체라는 점입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여래를 모든 상을 다 갖춘 존재로 볼 수 있 그 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모든 상을 다 갖춘 존재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可以具足諸相見不?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가이구족제상견부? 
不也, 世尊! 如來不應以具足諸相見.
불야, 세존! 여래불응이구족제상견.

처음의 “구족색신”은 실질적인 것으로서 신체를 말합니다. 소위 보신 (報身)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다른 문제가 제기됩니다. 여래를 상(相)에 집착해서 볼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갑자기 눈앞에 부처가 서 있다면 이것은 상(相), 즉 현상입니다. 부처가 수보리에게 묻습니다. "상(相)으로써 볼 수 있는가?” 수보리는 당연히 불가하다고 말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금강경』 앞부분에서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종교적인 우상에 사로잡혀서도 안 되며 또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보고자 해서도 안 됩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여래께서 모든 상을 다 갖추었다고 하신 것은 모두 갖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일러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何以故? 如來說諸相具足, 卽非具足, 是名諸相具足.
하이고? 여래설제상구족, 즉비구족, 시명제상구족.

진정한 부처는 법신(法身)으로서, 이것을 보아야만 진정한 부처를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신이란 무엇일까요? 아무리 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요, 일체의 상(相)이 없는 것입니다. 법신은 상이 없으며, 경계도 없습니다. 만약 하나의 경계상에 있다면 이미 머무름이 있는 것이요 집착함이 있는 것으로, 이렇게 된다면 명심견성(明心見性)할 수 없습니다. 일체의 상의 모두 공(空)이 될 때에야 비로소 명심견성할 수 있으며, 부처를 볼 수 있습니다.

 

 글은 남회근 선생의 '금강경 강의'에서 참조하고, 인용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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