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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경전/금강경

금강경 제21품 비설소설분

by 파장波長 2022. 5. 23.

제21품 어떤 법도 말로써 설명할 수 없다.

21·非說所說分

須菩提! 汝勿謂如來作是念, 我當有所說法, 莫作是念! 
수보리! 여물위여래작시념, 아당유소설법, 막작시념
何以故? 若人言, 如來有所說法, 卽爲謗佛, 不能解我所說故
하이고? 약인언, 여래유소설법, 즉위방불, 불능해아소설고。
須菩提! 說法者, 無法可說 是名說法.
수보리! 설법자, 무법가설 시명설법.
爾時, 慧命須菩提, 白佛言, 
이시, 해명수보리, 백불언.
世尊! 頗有衆生, 於未來世聞說是法, 生信心不? 
세존! 파유중생, 어미래세문설시법, 생신심부?
佛言, 須菩提! 彼非衆生, 非不衆生,
불언 수보리! 피비중생, 비불중생,
何以故? 須菩提! 衆生衆生者, 如來說 非衆生, 是名衆生.
하이고? 수보리! 중생중생자, 여래설비중생, 시명중생.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수보리여! 그대는 여래가 마땅히 설법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말하지 마라. 이렇게 생각하지 마라. 왜냐하면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께서 설법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곧 여래를 비방하는 것으로, 내가 말한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須菩提! 汝勿謂如來作是念, 我當有所說法, 莫作是念!
수보리! 여물위여래작시념, 아당유소설법, 막작시념! 
何以故? 若人言, 如來有所說法, 卽爲詩佛, 不能解我所說故. 
하이고? 약인언, 여래유소설법, 즉위방불, 불능해아소설고 .

부처가 스스로 말을 꺼내 수보리에게 말합니다. “그대는 절대 부처가 이 세상에서 설법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는 것입니다. 부처는 서른한 살에 도를 깨친 후 설법을 시작하여 여든 살에 열반에 들었으니, 사십구 년간을 설법했습니다. 그런데도 여기서 이 모두를 부인해 버립니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라〔莫作是念〕, 절대 내가 불법을 설했다고 생각하지 마라. 왜 그런가? 가령 어떤 사람이 여래는 설법한 것이 있으며 그것도 진정으로 어떤 법을 설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다〔卽爲務佛〕.”

부처는 우리에게 염불을 하고, 지관(止觀)을 닦고, 계정혜( 定慧)를 닦으라고 했습니다. 이 밖에도 소위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이니, 반야(般若)니 법상(法相)이니 유식(唯識)이니 하는 것들도 모두 부처가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이제 만약 어떤 사람이 내가 설법을 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나를 비방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부처는, 이런 사람은 불법을 비방하고 있는 것이라 말합니다. 무슨 이유일까요? “이 사람은 비록 불법을 배우고 또 들었지만 내가 말한 불법을 이해하 지 못해 내가 설법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건 잘못된 것이다.”

오도(悟道)나 성불(成佛)은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증득하는 것으로, 부처가 말한 법()은 뗏목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강을 건너는 배와 같습니다. 강을 건너고 나면 배를 등에다 지고 갈 필요가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강을 건너고 나서는 배는 필요치 않습니다. 자신이 직접 헤엄쳐 건너갈 수도 있습니다. 부처는 반드시 자신의 배 를 타고 건너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선종에는 많은 교육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배조차 제공하지 않고 스스로 방법을 찾아서 건너가기고 합니다. 스스로 고해(苦海)를 건널 방법만 있으면 됩니다. 이 부처의 설법은 바로 이 이치를 이해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부처가 말한 법()을 전혀 알아듣지도 못하고 스스로 명심견성하거나 도를 깨닫지도 못하면서 도리어 그 법에 한사코 매달려 그것을 진실이라 생각한다면 이는 참으로 닭 털을 들고 영전〔令箭, 군령을 전하는 화살〕으로 삼는 격입니다. 그래서 부처는 지금 자신이 설법했다는 것을 부인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설법한 뜻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어서 이유를 말합니다.


가섭이 웃다.

“수보리여! 설법이란 어떤 법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일러 설법이라 한다.”

須菩提! 說法者, 無法可說,是名說法.
수보리! 설법자, 무법가설, 시명설법.

진정한 불법은, 부처가 한마디로 압축했지만, 바로 불가사의입니다. 후세 선종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루는 석가모니불이 영산(靈山)의 모임에서 설법을 하는데, 제자와 학생들이 모두 부처가 말하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한참 동안이나 말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강단 위로 꽃 한 송이를 들어 올리더니 한 바퀴 빙 돌렸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부처의 대제자인 가섭존자만이 빙그레(破顔)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것은 책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이 '파()’ 자는 참으로 절묘한 묘사입니다. 한참을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 표정은 하나같이 엄숙해 분위기가 극도로 무겁습니다. 그런 가운데 가섭존자가 참지 못하고 그만 웃어 버리고 맙니다. 이것을 보고 부처가 말합니다. “나에게는 정법안장 열반묘심이 있으나 상()이 없는 실상(實相)이며 미묘한 법문으로, 문자로 표현할 수 없어 별도로 전해야 하니, 이제 이것을 마하가섭에게 맡기노라! 〔我有正法眼藏, 涅製如心, 實相無相, 微妙法門, 不立文字, 敎外別傳, 付囑摩訶迦葉〕” 이는 가섭이 부처의 뜻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선종의 시작입니다.


수보리와 부처의 대답

그때 혜명수보리가 부처께 아뢰기를, “세존이시여! 미래의 많은 중생이 이 법을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신심이 생기겠습니까?”

爾時, 慧命須菩提, 白佛言, 
이시, 혜명수보리, 백불언
世尊! 願有衆生, 於未來世聞說是法, 生信心不?
세존! 파유중생, 어미래세문설시법, 생신심부?

여기서 돌연 수보리 앞에다 두 글자를 추가해 ‘혜명수보리’라 부릅니다. 구마라습이 경전을 번역하면서 고의로 두 글자를 추가한 것 같습니다. 사실 부처 역시 아무 법()도 설한 적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부처는 단지 우리에게 육체를 부처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고, 셋째는 부처가 아무 법도 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세 요점 외에 결코 법문이라 할 만한 어떤 것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은 이해한 것 같습니다. 바로 우리의 대사형인 수보리입니다. 이해했다는 것은 곧 여래의 혜명(慧命)을 짊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혜명수보리라 부른 것입니다. 부처의 제자 중에서 수보리는 반야 공성(空性)의 증득에서 제일인자라 불렸습니다. 오늘 여기 앉아 있는 분들도 자성(自性)이 공()임을 일념간에 증득하기만 하면 곧 혜명을 얻어 그것을 이어받게 되는 것입니다. 소위 연등(然燈) 〔燃燈과 통용되며 ‘등불’을 켜다' 라는 의미임〕이라는 것도 일념간에 자성이 공임을 증득하여 해명을 얻고, 또 그것을 이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등’ 이라는 것은 등에 불을 붙여 그것을 꺼지지 않게 전달하는 것〔傳燈〕이기도 합니다.

혜명수보리는 지금까지 부처의 말을 죽 듣고서 곧 이해했습니다. 즉 불법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말할 만한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해했기 때문에 한 가지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부처님! 장래의 중생들 역시 이런 말씀을 들으면 과연 신심이 생길 수 있을까요? 〔世尊! 頗有衆生, 於未來世聞說是法, 生信心不


부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보리여! 그들은 중생이 아니요,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다.”

佛言, 須菩提! 彼非衆生, 非不衆生 
불언 수보리 피비중생 비불중생

부처의 대답은 아주 묘합니다! 근본적으로 수보리가 제기한 문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무엇을 중생이라 하는가? 본래 중생이란 없다.” 이 말 은 아주 중요합니다. 후세의 일체 중생을 모두 부정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중생이라 하는가? 본래 중생이란 없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유가(儒家) 고정림(顧亭林)의 해석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두 개의 통 중 하나는 비어 있고〔〕하나는 물이 들어 있는데〔〕, 이 통의 물을 저 통에 붓고 저 통의 물을 이 통에 부어 봐야 바로 그 물이 그 물이라는 겁니다. 법()이란 법이 아니라 이름이 법이며, 색신(色身)이란 색신이 아니라 이름이 색신입니다. 모두 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언뜻 보면 의미가 통하지 않습니다. 장래의 중생들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듣고 신심(信心)을 일으킬 수 있겠느냐고 수보리가 물으니까, 부처는 신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단지 무엇이 중생인지에 대해서만 말할 뿐입니다. 소위 중생이라는 것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새과 부처

“왜냐하면 수보리여! 중생 중생 하는 것을 여래가 중생이 아니라 함은 이름이 중생이기 때문이다.”

何以故? 須菩提! 衆生衆生者, 如來說非衆生, 是名衆生.
하이고? 수보리! 중생중생자, 여래설비중생, 시명중생.

생명을 지닌 일체 중생은 모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삼계(三界) 육도(六道)와 이십오 종의 중생은 모두 인연에 의해 생겨나는 것으로, 고정된 것이 없습니다. 법신(法身)의 생명은 육도윤회 중 부단히 변화합니다. 자신의 업보와 인연에 따라 변화합니다. 그러므로 일체 중생은 중생이 아닙니다. 

부처의 본의는 일체 중생의 자성(自性)이 본래 부처라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은 모두 스스로 자신을 돌이켜 보아 명심견성할 수 있으므로 중생이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중생이든 모두 부처입니다. 방금 이야기 했지만, 도생법사가 말한 것처럼 '일천제' 같은 사람도 최후에는 성불할 수 있습니다. 『열반경』이나 『법화경』에서도 그렇게 말합니다. 석가모니불은 우리가 사는 이 겁수(劫數)에서 네 번째 존엄한 부처입니다. 바로 네 번 째로 나타난 부처입니다. 이 겁수를 현겁(賢劫)이라 하는데, 현겁에는 모두 천 명의 부처가 세상에 옵니다. 최후로 성불하는 사람은 바로 계단을 다 오른 부처인데, 현재의 화신(化身)이 베다(Veda) 보살입니다. 그의 원력 (願力)은 현겁의 부처 천 명을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모두 성불 하기를 기다렸다가 최후에 성불합니다. 이것이 현겁에 대한 불교의 설명 입니다. 말을 바꾸면 이 세상의 일체 중생은, 비단 사람뿐 아니라 생명과 영지(靈智)가 있는 생물이면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체의 중생은 모두 평등합니다.

이 이치를 철저히 연구한 것이 바로 법상(法相)과 유식(唯識)의 원리입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견법(見法)은 곧 견지(見地)입니다. 인세간(人世間)에서는 일체 중생이 아견(我見)을 갖기 때문에 사람이 생겨납니다. 사람이 생겨나면 내가 생기고, 내가 생기면 시비가 생기며, 시비가 생기면 번뇌가, 번뇌가 생기면 고통이 생깁니다. 이렇게 해서 줄줄이 이어집니다. 비록 우리에게 신체가 있지만 이 신체는 우리 것이 아니라 잠시 나에게 속한 것입니다. 즉 이 신체는 인연에 의해 사대(四大)가 잠시 합쳐진 것으로,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마침내는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진정한 자성(自性)은 불생불멸합니다. 이 자성은 공성(空性)으로서, 반드시 무아(無我)의 경지에서만 도달할 수 있습니다. 무아의 경지를 닦아 증득하면 지혜를 얻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유식(唯識)에서 말하는 평등성지(平等性智)' 입니다. 내가 없으면(無我) 사람도 없고(無人), 사람이 없으면 그도 없고〔無他〕, 중생상(衆生相)도 없으며, 번뇌도 없고, 일체의 것이 모두 없습니다. 일체가 모두 공()인 것이 바로 무중생상〔無衆生相〕입니다. 이것을 유식에서는 드러내어 설명하지만, 금강반야법문에서는 드러내지 않고 설명합니다.

 

 글은 남회근 선생의 '금강경 강의'에서 참조하고, 인용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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