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붓다경전/금강경

금강경 제23품 정신행선분

by 파장波長 2022. 5. 23.

제23품 깨끗한 마음으로 선을 행하다

 

23 · 淨心行善分 

復次, 須菩提! 是法平等, 無有高下,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부차, 수보리! 시법평등, 무유고하, 시명아뇩다라삼막삼보리.
以無我, 無人, 無衆生, 無壽者, 修一切善法, 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이무아, 무인, 무중생, 무수자, 수일체선법, 즉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
須菩提! 所言善法者, 如來說卽非善法, 是名善法.
수보리! 소언선법자, 여래설즉비선법, 시명선법. 


일체의 선법을 닦다.

"다음으로, 수보리여! 이 법은 평등해 높고 낮음이 없으니, 이것을 일러 아뇩라삼막삼보리라 한다. 무아 · 무인 · 무증생 · 무수자로써 일체의 선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얻는다.”

復次, 須菩提! 是法平等, 無有高下, 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부차, 수보리! 시법평등, 무유고하, 시명아뇩다라삼막삼보리 
以無我, 無人, 無衆生, 無壽者, 修一切善法, 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이무아, 무인, 무중생, 무수자 수일체선법, 즉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

 부차(復次)란 그 다음 문제 혹은 다른 하나의 문제' 라는 뜻입니다. 부처는 앞에서 어떤 것도 모두 부정했습니다. 부처도 아니요, 상()이 있는 것도 아니요, 형체(]가 있는 것도 아니요, 얻을 수 있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라 했습니다. 이렇게 일체를 부정해 놓고 나서 여기서는 그럼에도 성불하려면 일체의 선법(善法)을 닦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일체의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받들어 행해야 하며〔諸惡莫作, 衆善奉行〕, 선법이 없는 성취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몇 권의 불교 서적을 읽고, 선()이나 공안(公案)을 말하고, 다리를 틀고 앉아 있으면 곧 성불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평생 업()을 짓고도 절에 쫓아 올라가 다리를 틀고 앉아 며칠 소식(素食)하는 것으로 보리(菩提)를 얻을 수 있다면 그 보리라는 것이 한 개에 얼마쯤이나 하는 것이겠습니까? 선()에 관한 책 몇 권 읽으면 청개구리가 퐁당! 하고 물에 뛰어드는 소리만 듣고도 곧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쉬운 일일까요? 그렇다면 개구리 한 마리 사서 팔짝팔짝 뛰는 모습을 지켜보십시오! 이 때문에 "일체의 선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얻을 수 있다〔修一切善法, 卽得阿多羅三統三菩提〕”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루에 한 가지 선행도 우리는 행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행위를 살펴보십시오. 하루에 한 가지 악은 행할지 몰라도, 누가 능히 하루에 한 가지 선행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일체의 선법을 닦지도 않고서 무상(無相)에 이르렀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부처는 수보리에게 말합니다. “진정한 불법은 평등하다〔是法平等〕, 높고 낮음이 없다〔無有高下〕.” 팔 만 사천 법문도 좋고, 염불도 좋고, 밀종도 좋고, 참선도 좋고, 지관(止觀)을 닦는 것도 좋으며, 심지어 방문좌도〔旁門左道〕를 닦아도 좋습니다. 화엄의 경계에서 보면 어떤 것도 모두 평등합니다. 진정한 불법은 평등합니다.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부처가 앞에서도 말했지만, 일체의 성현은 모두 무위로 법을 삼으나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차별이 없다는 것 입니다.


남쪽 산은 높고 북쪽 산은 낮다.

후세의 선종에 이런 공안(公案)이 생겼습니다. 어떤 법사가 금강경을 설하고 있는데 한 선사가 물었습니다. “불법이 평등하고 높고 낮음이 없다면, 왜 남쪽 산은 저렇게 높고 북쪽 산은 저렇게 낮은가요? 온갖 법이 모두 노고 낮음이 있거늘, 어찌 높고 낮음이 없다고 하는가요?” 이것 역시 하나 의 화두입니다.

우리는 평등성지(平等性智)를 알고 있습니다. 제팔지(第八地)를 성취해야만 비로소 평등성지를 증득할 수 있습니다. 제육식(第六識)이 공()이 되어야 묘관찰지(妙觀察智)를 증득할 수 있고, 제칠식(第七識)의 아집이 공()이 된 후에야 비로소 평등성지를 증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일 체 중생이 평등하며, 나와 남이 모두 평등합니다. 우리가 번뇌를 느까는 것은 나와 남이 있고, 중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번뇌는 나와 남을 분별 하는 데에서 나옵니다. 그렇다면 아상(我相), 즉 아견(我見)이 공()이 된 후 평등성지가 나타나며, 다시 여기서 일체 중생을 평등하게 보는 것이 곧 아누다라삼막삼보리일까요? 그러나 일체의 선()을 닦아야만 비로소 공 ()을 증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체의 선법을 닦으면 곧 아누다라삼 막삼보리를 얻을 수 있다” 라고 한 것입니다.

수보리여! 소위 선법을 여래는 선법이 아니라 말하니, 그것의 이름이 선법 이다.”

須菩提! 所言善法者, 如來說卽非善法, 是名善法.
수보리! 소언선법자, 여래설즉비선법, 시명선법.

만약 어떤 바람이 있어서, 즉 부처의 열매를 얻기 위해, 혹은 자신의 복보나 공덕을 얻기 위해 일체의 선법을 닦는다면, 이것은 인천(人天)이 과보(果報)이며 범부의 수행법이자 범부의 선()입니다. 진정한 선법은 비 리의 열매(菩提道果)를 위해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면서도 그것 을 행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복덕을 구하는 마음이 없어야만 비로소 진정한 선법입니다. 이것은 다시 덧붙여 해석한 것입니다. 이 품의 게송은 다음과 같습니다.

 

 글은 남회근 선생의 '금강경 강의'에서 참조하고, 인용 했습니다.

'붓다경전 > 금강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강경 제25품 화무소화분  (0) 2022.05.24
금강경 제24품 복지무비분  (0) 2022.05.23
금강경 제22품 무법가득분  (0) 2022.05.23
금강경 제21품 비설소설분  (0) 2022.05.23
금강경 제20품 이색이상분  (0) 2022.05.2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