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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경전/금강경

금강경 제25품 화무소화분

by 파장波長 2022. 5. 24.

제25품 교화함이 없는 교화

 

第25品·化無所化分 화무소화분

須菩提! 於意云何? 汝等勿謂如來作是念, 我當度衆生.
수보리! 어의운하? 여등물위여래작시념, 아당도중생.
須菩提! 莫作是念! 何以故? 實無有衆生如來度者. 
수보리! 막작시념! 하이고? 실무유중생여래도자.
若有衆生如來度者, 如來卽有我人衆生壽者.
약유중생여래도자, 여래즉유아인중생수자.
須菩提! 如來說有我者, 卽非有我, 而凡夫之人, 以爲有我. 
수보리! 여래설유아자, 즉비유아, 이범부지인, 이위유아.
須菩提! 凡夫者, 如來說卽非凡夫, 是名凡夫.
수보리! 범유자, 여래설즉비범부, 시명범부.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그대들은 이렇게 말하지 마라. 여래께서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라고, 수보리여! 이렇게 생각하지 마라. 왜냐하면 실로 여래가 제도한 중생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여래가 제도한 중생이 있다면, 여래에겐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이 있다. 수보리여! 여래가 ‘내가 있다’ 고 말하는 것은 ‘내가 있는’ 것이 아니나, 범부는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수보리여! 범부를 여래는 범부가 아니라 말하니, 그것을 일러 범부라 한다.”


그 이름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떤가? 그대들은 이렇게 말하지 마라. 여래께서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라고”

須菩提 於意云何? 汝等勿謂如來作是念,我當度衆生. 
수보리 어의운하? 여등물위여래작시념, 아당도중생.

이것 역시 부처 스스로 말한 것입니다. 수보리에게 말합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은 절대 부처가 이런 생각을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汝等列謂〕.” 어떤 생각을 말하는 것일까요? 마땅히 일체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我當度衆生〕는 생각입니다.

부처의 말씀이 아주 오묘합니다. 『금강경』을 자세히 공부해 보면, 부처 일생에 있었던 수많은 상황들을 『금강경』속에서 모두 부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십구 년간을 설법하고서도 『금강경』에서는 한마디도 말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바로 그가 말한 이 『금강경』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데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본래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발원을 하고서도 이제 또 부인합니다. "이보게! 착각해서는 안되네. 그렇게 생각하지 말게! 내가 일체 중생을 제도하려 했다고 그렇게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되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금강경』의 결론은 한마디로 "교화함이 없는 교화〔化無所化〕" 입니다. 무엇을 '교화〔化〕'라 할까요? 당나라 이전에는 대부분의 불경에서 '교화' 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당송(唐宋) 이후에는 '사람을 제도한다.'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제도' 도 좋고 '교화'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제도'라 해도 제도할 수 없고, '교화' 라 해도 교화하기가 아주 힘듭니다. 원명(元明) 시대에 이르러서는 아예 이 두 개념을 합쳐 '제도하고 교화한다〔度化〕'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제도하고 교화하는’ 것이란 사실 교육을 말하는 것으로, 사람을 감화시켜서 변하게 하는 것입니다.


“수보리여! 이렇게 생각하지 마라. 왜냐하면 실로 여래가 제도한 중생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여래가 제도한 중생이 있다면, 여래에겐 아 · 인 · 중생 · 수자가 있다.”

須菩提! 莫作是念! 何以故? 實無有衆生如來度者.
수보리! 막작시념! 하이고? 실무유중생여래도자. 
若有衆生如來度者, 如來卽有我人衆生壽者.
약유중생여래도자, 여래즉유아인중생수자.

“절대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莫作是念〕!” 라고 앞에서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여기서 다시 반복합니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을 가져서는 절대 안 된다. 좋습니다. 우리는 이제 부처의 말을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부처님, 저를 제도해 주십시오!, 이렇게 머리를 조아리고 말 할 필요 없습니다. 이 어른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지금 아주 바쁨 니다. 막 열반에 들려고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왜 그럴까요? “실로 여래가 제도한 중생은 하나도 없기〔實無有衆 生如來度者〕” 때문입니다. 이 말은 중요합니다. 방금 우리는 우스갯소리처럼 부처가 일체를 부인했다고 말했는데,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이유를 들으니 온통 오리무중에 빠져 버리는 것 같습니다. 무슨 이유일까요? 실제로 세상에는 부처의 제도를 필요로 하는 중생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래가 제도한 중생이 있다면, 여래에겐 아·인·중생·수자가 있다〔若有衆生如來度者, 如來卽有我人衆生壽者〕.” 선종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은 관 하나로 두 사람을 묻는 것입니다. 당신이 나에게 구제를 받았다고 한다거나, 혹 나는 부처의 구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칩시다. 대선사(大禪師)라면 이 둘은 모두 도를 깨치지 못했다고 말할 겁니다. 부처 또한 그렇게 말합니다! “나는 한 사람도 제도한 적이 없으니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에 부처의 제도가 필요한 중생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 스스로 공부해 보아야 합니다. 부처는 또 말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제도되어 성불했다면, 자신은 부처가 아니라 아주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이미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는 지금 말합니다. “가령 그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즉 중생이 자신의 교화를 받아들여 도(道)를 얻을 수 있다거나 자신의 제자로서 마땅히 자신에게 이런저런 공경을 표해야 한다거나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것으로 끝장이다.〔卽有我人衆生壽者!〕 이것은 성불이라 할 수 없다!” 

좋습니다. 부처시여! 이제 잘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겸허하게도 자신이 다른 사람을 제도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우리는 당신의 제도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겸허한 것은 당신 몫이지만 공경하는 것은 우리 몫입니다. 각자 자신의 길을 간다면 잘못되는 것이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아직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당신께서 세상에 부처의 제도를 필요로 하는 중생은 없다고 하셨는데, 바로 이 문제입 니다! 이 문제에 대해 부처는 이어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해탈

“수보리여! 여래가 ‘내가 있다’ 고 말하는 것은 ‘내가 있는’ 것이 아니나, 범부는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 수보리여! 범부를 여래는 범부가 아니라 말하니, 그것을 일러 범부라 한다.”

須菩提! 如來說有我者, 卽非有我,而凡夫之人,以爲有我.
수보리! 여래설유아자, 즉비유아, 이범부지인, 이위유아 . 
須菩提! 凡夫者, 如來說卽非凡夫, 是名凡夫.
수보리! 범부자, 여래설즉비범부, 시명범부

진정한 불법은 우리에게 하나의 것, 즉 어떻게 하면 진정한 무아(無我)를 증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것을 얻으면 곧 성공입니다. 단지 이것만 닦아서 진정한 무아에 이르면 됩니다. 이미 무아에 이르렀다면 당연히 부처의 제도가 필요치 않습니다. 내가 바로 본래 부처입니다! 부처가 사람을 제도한다는 상(相)에 집착한다면, 부처는 곧 아상(我相) · 인상(人相)에 집착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도를 깨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무아로서 부처로서도 제도할 곳이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의 말은 틀린 데가 없습니다. 부처의 제도를 필요로 하는 중생은 없습니다. 보다 철저히 말한다면, 부처가 말한 팔만 사천의 법문은 당신께서 수행하여 증득한 법문을 모두 우리에게 일러 준 것입니다. 그대들도 이렇게 한다면 마찬가지로 성불할 수 있다는 겁니다. 부처는 우리가 성불하도록 도울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제도해야 합니다. 부처가 우리를 대신하여 닦아 줄 방법은 없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닦고 스스로 제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의 말은 사실입니다. 부처는 자신의 제도를 필요로 하는 중생이 없다고 했습니다. 부처 또한 그들을 제도할 수 없다는 겁니다. 반드시 스스로 신심(信心)을 지니고 스스로 닦아서 제도해야 합니다. 따라서 부처의 말은 한 군데도 틀린 데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부처가 표현하는 방법은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한마디 한마디 하는 말마다 이해 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사실 이치는 아주 간단합니다. 사람은 모두 스스로 해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성(自性)으로 스스로 제도하고 스스로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구해 줄 수 없습니다.

부처는 또 말합니다. “여래가 '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있는 것이 아니나, 범부는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如來說有我者, 卽非有我, 而凡 夫之人, 以爲有我〕.” 범부란 곧 일반인을 말하는 것인데, 불경을 번역하면서 사용한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범부라는 말을 듣기만 해도 마치 욕을 당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우리가 상대방에게 별 뜻 없이 당신은 범부라고 한다면, 그는 내심 불쾌하게 생각할 겁니다. '나를 깔보다니!'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보통 사람에게 당신은 무아의 경지에 이른 것 같다고 해도 그는 두려워할 겁니다. 사람들이 모두 자기의 경지를 탐내고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과연 어떤 것이 궁극적인 '나'일까요? 불경은 말합니다. 인체는 서른여섯 가지가 우연히 결합된 것으로, 그 중 어떤 것도 내가 아니다.”

이 문제는 현실적으로 생각할 때 더 중요합니다. 인체의 수많은 세포들이 모두 '나'인데, 그 중 어떤 것도 내가 아니라 한다면 '나' 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신체상에 내가 없다면 죽은 뒤에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영혼이 ‘나’ 라고요? 영혼을 본 적이 있습니까? 문득 들리는 경쇠 소리에 온갖 인연으로부터 깨어난다는 것이 바로 이 경계를 말합니다. 이 소리를 듣고서 무아에 이릅니다. 본래 어떤 것도 무아입니다. 어떤 것도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 무아의 경계를 부처는 단지 나에게 분석해서 들려주고 있을 따름입니다. 

 

∴ 이 글은 남회근 선생의 '금강경 강의'에서 참조하고, 인용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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