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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경전/금강경

금강경 제24품 복지무비분

by 파장波長 2022. 5. 23.

제24품 복과 지혜는 비교할 수 없다.

 

第24品·福智無比分 

須菩提! 若三千大千世界中, 所有諸須彌山王, 如是等七寶聚, 有人持用施. 
수보리! 약삼천대천세계중, 소유제수미산왕, 여시등칠보취.
若人以此般若波羅蜜經, 乃至四句等, 受持讀誦, 爲他人說, 於前福德, 
약인이차반야바라밀경, 내지사구게등, 수지독송, 위타인설, 어전복덕,
百分不及一, 百千萬億分, 乃至算數譬, 所不能及.
백분불급일, 백천만억분, 내지산수비유, 소불능급.


이 품은 제23품과 이어지는 것으로 하나의 중간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품의 제목은 “복과 지혜는 비교할 수 없다."로서,  복덕과 지혜를 다룹니다. 복덕과 지혜는 모두 평등한 청복(淸福)으로, 보리(菩提)를 증득하고 성불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 밑천, 즉 불교 용어로 표현하면 두 가지 자량(資糧)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량이란 자본과 양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두 가지를 복덕 자량, 지혜 자량이라고도 부릅니다.

지금 이 품에서는 재삼 동일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문제를 왜 여기서 다시 끄집어내고 있을까요? 바로 앞의 제23품에서 일체의 선법(善法)을 닦으면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즉 도를 깨치기 위해서는 참선를 하거나, 공안(公案)을 연구하게나, 보살을 예배하거나, 혹은 외적 성공을 꾀하는 식으로는 되지 않으며, 반드시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받들어 행해야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은 소극적인 것이요,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적극적인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일체의 선법을 닦아야만 비로소 깨달음을 얻어 대철대오의 경계를 증득할 수 있습니다.

제23품의 마지막에서는 법신인 실상반야의 본체로써 해설했습니다. 소위 일체 선법이란 일체 선법이 아니며, 그것의 이름일 뿐이라 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선법은 선을 행하면서도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집착한다면 곧 범부의 행위로서, 집착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보살도라 할 수 있습니다. 보살도란 사람을 이롭게 하고, 세상을 구하며, 일체의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본분입니다. 이제 부처는 이 품에서 스스로 결론을 내립니다.


자량을 닦다

“수보리여!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수미산만큼 칠보를 쌓아 놓고 보시하더라도,”

須菩提! 若三千大千世界中, 所有諸須彌山王, 如是等七寶聚, 有人持用布施
수보리! 약삼천대천세계중, 소유제수미산왕, 여시등칠보취, 유인지용보시

부처가 수보리에게 말합니다. “우리 이 세계에, 이 사바세계에 수미산이라는 산이 하나 있다.” 다소 무리가 있지만 수미산은 히말라야 산에 비할 수 있습니다. 물론 히말라야 산이 수미산인 것은 아닙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 문제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서 함부로 단정할 수 없습니 다. 불경에서 말하는 수미산을 히말라야 산으로 해석한 것은 최근 수십 년 간의 연구를 통해 제시된 하나의 가설입니다. 이 가설에는 많은 문제가 있으므로 함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단지 하나의 비유로서, 이 세상에서 제일 큰 산을 수미산이라 칭한 것입니다. 기타 삼천대천세계에도 모두 중심이 되는 큰 산이 있으므로, 아주 이 수미산이 있습니다. “수미산만큼 칠보를 쌓아 놓고〔如是等七寶聚〕", 이 '등(等)’ 자를 해석하면서 칠보로써 보시하고 거기다 수미산까지 보시 주는 것으로 새겨서는 안 됩니다. 수미산을 사람들에게 보시해 봐야 아무 교도 없습니다. 방 안에 장식할 수도 없을 테고요. 이 '등(等)'은 비유하는 말입니다. 수미산처럼 그렇게 많은 재화, 칠보 · 진주 · 다이아몬드를 쌓아 놓고 보시한다는 것으로, 하나의 비유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경 내지 사구게를 수지 독송하여 다른 사람에게 말해 준다면, 앞의 복덕은 이 복덕의 백 분의 일, 백천만억 분의 일 내지는 산술적 비유로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若人以此般若波羅蜜經, 乃至四句偈等, 受持讀誦, 爲他人說, 於前福德
약인이차반야바라밀경, 내지사구게등, 수지독송, 위타인설, 어전복덕,
百分不及一, 百千萬億分, 乃至算數譬, 所不能及.
백분불급일, 백천만억분, 내지산수비유, 소불등급.

이렇게 많은 것으로 보시한다면, 이 사람의 복보(福報)는 당연히 클겁니다. 앞의 제13품에서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여기서 다시 보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종교를 믿으면서 모두 공리적인 생각을 갖습니다. 즉 공리적 목적으로 종교를 믿습니다. 진정 공리적인 것을 원한다면, 밑천을 적게 들이고 큰 이익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일체의 선을 행해야만 합니다. 지금 부처가 말하는 이 사람은 선을 행하면서 수미산만큼 많은 칠보로써 보시합니다. 비록 복덕을 바라지 않더라도 그 복덕은 반드시 아주 클 겁니다. 이건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부처는 이 비유를 들어 강조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있어서 ‘이’ 반야바라밀경으로 보시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이〔此〕란 『금강반야바라밀경』만을 가리킵니다. 반야바라밀에 관한 경전은 아주 많습니다.  『대반야경』이라 부르는 『대반야바라밀경』을 비롯해 『인왕호국반야바라밀(仁王護 國般若波羅蜜)』과 이 외에 여러 바라밀 경전이 있습니다. 이들 경전은 각기 노선은 다르지만 모두 지혜의 성취를 말하고 있습니다. 현재 본 경전에서 말하는 ‘이〔此〕'란' 『금강반야바라밀경』만을 가리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의 이치로써, 혹 전부가 아닌 사구게(四句偈)만이라도 수지(受持) 하고 독송(讀誦)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설명해 준다면, 이 복보는 수미산 만큼 많은 칠보로써 보시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  글은 남회근 선생의 '금강경 강의'에서 참조하고, 인용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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