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붓다입문

모르고 살아가는 인생

by 파장波長 2022. 4. 14.

우리들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들은 그 모습을 궁금해하며 해답을 찾아 헤매다 일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런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한평생 살아가면서 목숨 걸고 그 해답 찾아간다는 일은 가치 있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삶은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생로병사(生老甁死)의 인연을 해결해 가는 과정으로, 태어난다는 것도 고 통스 럽스럽고, 살아간다는 것도 힘들긴 마찬가지입니다. 살아가는 것은 아픔을 치유해 가는 과정입니다. 우리들은 작은 상처 하나에도 울고불고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우리들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하는 원인이 되지 않았는지 돌아보곤 합니다. 큰 병에 고통받았다는가, 평생을 의지해 함께 살아가던 사람의 이별과 죽음의 아픔과  고통은 흘러내리는 눈물로도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은 기쁨과 즐거움 보다는 괴로움과 고통으로 얼룩진 시간들 이었습니다. 환희(歡喜)에 넘치는 시간은 기억에 없었고 오늘도 시간 속에 정해진 날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사는지, 이 길을 왜 가야 하고 그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끝도 모를 인생을 그저 안개 낀 다리를 건너는 사람과 같이 어림짐작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인생을 다 알고 있는 듯이 웃고 즐기며 살고 있습니다. 

 

모들고 살아가는 삶을 알고 살아가는 삶으로 바꾸어 주는 종교가 바로 불교입니다. 죄를 저질렀어도 그것이 죄라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은 계속에서 죄를 짓는 행위를 할 것입니다. 죄를 저지르면 벌을 받고 그것인 나와 남에게 아픔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우리가 어떻게 때어났고, 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경전에 나오는 비유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넓게 트인 벌판을 어슬렁 걸어가고 있었다. 그 때 뒤에서 험악하게 생긴 성난 코끼리가 달려들었다. 이 사람은 무서운 코끼리를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달아나다 보니까 몸을 피할 수 있는 우물이 보이자 급한 나머지 우물 속으로 몸을 피해 들어갔다. 우물에는 마침 칡넝쿨이 있어서 그것을 타고 내려갔다. 한참 내려가다 정신을 차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밑에는 무서운 독사가 입을 벌이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위를 쳐다보니 코끼리가 아직도 우물 밖에서 성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 사람은 할 수 없이 칡넝쿨에만 매달려 묵숨을 부지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달그락달그락 소리가 나서 주위를 살펴보니 위에서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가면서 칡넝쿨을 갈아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우물 중간에는 작은 뱀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면서 이 사람을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온몸에 땀이 날 정도로 두려움에 떨며 칡넝쿨에만 의존하고 위만 쳐다보고 있는데 그때 어디선가 벌 다섯 마리가 나타나서 칡넝쿨에다가 집을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꿀을 한 방울씩 떨어뜨려 주는 것이었다. 이 사람은 그 꿀맛에 취해서 왜 더 많은 꿀을 떨어뜨려 주지 않나 생각에 빠져서 자신이 처한 위급한 상황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인생에 비유하고 있는 이 이야기에서 코끼리는 무상하게 흘러가는 세월을 의미합니다. 칡넝쿨은 생며을, 검은 쥐와 흰 주는 밤과 낮을 각각 의미 합니다. 작은 뱀들은 가끔씩 몸이 아픈 것이고, 독사는 죽음을 의미하고, 벌 다섯 마리는 인간의 오욕락(五慾樂)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욕(五慾)이란? 재물에 대한 욕망, 이성에 대한 애욕, 먹을 것에 대한 탐욕, 명예에 대한 욕망, 편안함의 추구를 말합니다. 자신의 처한 현실을 알지 못한 채 떨어지는 욕심의 꿀맛에 취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오욕락(五欲樂) : 사람들의 참된 마음을 더럽히는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에 대한  욕망으로 그것을 향락(享樂)하는 세속적인 인간의 욕망입니다.

 

어떤 사람은 욕망이 없다면 인생의 의미가 없디 않겠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욕망으로 인해 이루는 것보다 욕망때문에 잃은 것이 더 많지 않을까요? 욕심은 눈 앞의 이익에 급급해 보다 넗은 안목으로 바라보는 지혜를 흐리게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후회 해도 지나온 과오는 돌일킬 수가 없는 것이고요. 그래서 이런 장애를 제거시켜 참된 지혜의 눈을 같도록 해야합니다.불교에서는 삶의 현상을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현실' 이라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나 라는 생각' 이 그것입니다. 이 둘은 우리 인생을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그런게 관연 이 둘은 우리 인생을 바르게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일까요?먼저 현상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하나의 현상은 그 나름대로 법칙을 바탕으로 인하여 이루어집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신이 만물을 창조했다고 하지만 불교에서는 이 모든 것이 인연(因緣)의 법칙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자면, 눈 앞에 컵이 있다고 했을 때 이컵은 그것을 만든 재료에따라 유리컵, 종이컵, 금속컵 등의 종류로 나누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크기에 따라서 큰 컵도 있고, 작은 컵도 있을 것이고 또 색깔이 있는 컵도 있고 색깔이 없는 컵, 또는 손잡이가 달린 컵도 있고, 없는 컵도 있을 것입니다. 이 컵은 용도에 따라서 각기 그 쓰임새도 다를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한 현상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이 컵 하나에도 시행착오를 거듭한 인류의 삶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아주 작은 컵, 하나에도 인류의 역사의 혼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 들어 있는 역사의 과정을 인식하며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이 컵은 바로 과거와 현재의 수많은 인류의 부다한 생각을 담고 있는 결정체요 새로운 창도의 원동력임을 알지 못하고 그저 습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을뿐입니다. 그리고 같은 생각에도 쓰임새에 따라 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사회 공동체를 이롭게 하는 생각이 있는가 하면 사회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생각도 있습니다. 생각이 바르면 행동도 또한 반듯하게 되서 마침내 자신과 이웃이 화목한 길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학력이나 빈부의 격차, 잘생기고 못생기고 하는 등의 차별은 없습니다. 즉 생각을 바르게 하는것이 곧 자신의 삶과 이웃, 나아가 사회 구성원 전체의 삶을 아름답게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들 중에서도 '자기'와 '자기 생각' 만은 변함없이 같고 살고 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이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하고 법 먹고 일상의 생활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문득 '나는 누구이묘. 무엇을 향해 사는가' 하문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그 의문을 풀지 않고 그냥 철학적이고 골치아픈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쉽게 잊어 버리곤 합니다. 그러나 이런 고민은 바로 풀지 않으면 끝없이 이어지면서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나'를 괴롭히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사람들은 보통 얼릴 때 백일잔치나 돌잔치를 통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첫 문제에 부딪히게 되고, 내 몸이 아플 때나 다른 사람의 병문안을 통해서 병에 대해 생각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부고와 장례를 통해 죽음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길을 건너다. 셔핑을 하다가, 다리를 건너다가, 집에서 아이와 놀다가 우리는 죽음 그리고 여기에 동반된 아픔을 만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앞하기보다는 '아 내가 이번 일에 관련이 없고 아는 사람도 없구나' 하고 안도의 숨을 쉬면서 넘겨 버리곤 합니다. 물론 바쁜 삶으로 인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틈도 없이 하루 해를 보내는 것이 오히려 평범한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한 삶을 살다 보면 어제와 오늘은 변함없는 하루가 되고 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변함없는 무습으로 있으리라고 믿었던 자신의 모습이 변해가는 것을 느끼는 것 또한 감출 수 없는 현실입니다. 자신이 큰 착각을 하면서 살아왔음을 자각하게 해주고, 엊그제 낳은 줄로 알았던 아이는 이느새 멀쑥하게 큰 모습으로 나타나 부모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할 것입니다. 이런 변화에 마주하게 되면 삶에 자신감과 당당함이 사라져 가고 힘이 없어지는 자신을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우리가 늘 지녀온 '자기'와 '자기 생각' 이라는 것들의 본 모습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런한 삶의 과정을 성주괴공(成住壞空) 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이리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세계는 생겨났다가 잠시 머물러 있게 되고 그러다 마침내 깨어져서 사라져 버리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라진다는 말에만 집착하여 불교를 허무주적의 적인 종교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