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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기본 사상-업과 인과 붓다께서 살아 계실 당시에는 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하여 갖가지 주장을 펼쳤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섯 명의 외도가 유명했는데 이들을 육사외도(大師外道)라고 합니다. 그들은 대개 숙명론을 내세우거나 인과를 부정하고 쾌락주의를 따를 것을 가르쳤습니다. 붓다께서는 이들의 주장을 비판하시고 이들의 가르침이 초래할 윤리적 폐해를 염려하셨습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신 인과의 법칙은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따른다는 것으로 현실의 그 어떠한 행위도 예외는 아니어서 반드시 그에 따르는 결과를 수반하게 됩니다. 착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따르며, 악한 일을 하면 나쁜 결과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의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결과를 초래하는 윈인이 되는 행위를 업(業)이라고.. 2022. 4. 18.
불교의 기본 사상-육바라밀(六波羅蜜)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기도 하고 타인을 위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에 대한 판단을 누구에게도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붓다께서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바른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 길은 자신만을 위한 삶은 결코 아니며, 타인과의 과계 속에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과 모든 것을 함께 하라는 ‘상구보리 화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삶은 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 아닌 사람들과 서로 연결 된 관계, 즉 연기의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어떠한 방식으로 타인을 바라보느냐 하는 것은 깨달음을 이루고 부처님의 세상을 이루어 나가는데 있어서 대단.. 2022. 4. 18.
불교의 기본 사상-팔정도(八正道) 붓다께서는 부다가야에서 성도 후 다섯 비구를 찾아 와라나시 녹야원에서 첫 가르침을 펼치셨습니다. 그래서 불·법·승 삼보가 갖추어지고 불교라는 종교가 탄생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불교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붓다께서 설하신 첫 가르침은 사성제·팔정도와 중도의 설법이었습니다. 훗날, 붓다께서 열반 전 맨 마지막 제자가 된 수밧다라는 노인에게 해 주신 법문도 다름 아닌 팔정도가 중심이였고, 부처님께서는 수밧다에게 자신의 평생의 가르침을 정리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이 스물아홉에 집을 떠나 유익함을 찾기 어언 51년. 계율과 선정과 지혜를 닦고 조용히 사색하며 살아왔네. 이제 가르침의 요점을 말하나니 이 길을 떠나 사문의 삶이란 없네. 길은 팔정도가 최고, 진리는 사성제가 최고, 욕망을 다스림엔 .. 2022. 4. 18.
불교의 근본 사상-사성제(四聖諦) 연기법과 삼법인을 통해 현실을 여실하게 파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세계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고, 나아가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진리를 구현하는 수행의 길에 대해 알아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 사회관으로 제시하신 사성제의 가르침이다. 사성제란 '네 가지 의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으로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행한 최 초의 설법 내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성제는 부처님께서 연기의 진리를 현실에 맞게 응용하여 듣는 사람이 이해하기 쉽도록 재구성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네 가지 진리가 있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말하는가? 이른바 괴로움의 진리 (苦聖諦),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한 진리 (集聖諦),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 (滅聖諦),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 2022. 4. 18.
불교의 근본 사상-연기(緣起)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의는 연기법이라 할 수 있다. “법을 보는 자는 여래를 보고, 여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는 가르침은 부처님이 연기의 진리를 깨달아 비로소 붓다가 되었으며, 동시에 그 깨달음의 핵심이 바로 연기법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일구월심 사유하던 성자에게 모든 존재가 밝혀진 그 날 그의 의혹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연기의 도리를 깨달았으므로 〈자설경〉〉 수행자 싯달타가 붓다가야 부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어 성자가 되셨다. 그러면 그 깨달음의 대장은 무엇이겠는가? 여러 가지 견해가 있겠지만 그중 가장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것이 세계관으로서의 연기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연기법이란 존재하고 있는 것이나 생각에 떠오르는 모든 것은 .. 2022. 4. 18.
불교의 근본 사상 - 삼법인 삼법인(三法印)은 참된 불교의 사상 우주 만유를 관통하는 법칙이 연기법이라면 존재의 실상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삼법인이다. 삼법인(三法印)이란 세 가지의 진실한 가르침이란 뜻으로, 도장 인(印)자 를 쓴 것은 도장이 언제 어디서나 동일하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의 내용도 언제 어디서나 동일함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한 다른 외도(外道)들의 가르침과 확연히 구분되는 가르침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쉽게 말해서 불교임을 나타내는 인감도장이라고 할 수 있다. 삼법인은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제행 무상(諸行無常), 모든 변화하는 것은 영속적인 자아의 실체가 없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 그리고 모든 변화하는 것은 괴로움을 발생시킨다는 일체개고 (一切皆苦)의 세 가지를 말하며, 일체개고 대신 이 모든 괴로움을 뛰어넘은 열반.. 2022. 4. 18.
각자의 모자람을 스스로 인정하라 고통을 맛보지 않으면 우리는 연민의 정을 기를 수가 없고, 행복을 제대로 음미할 수 없습니다. 고통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을 감당하는 것 또한 우리에겐 하나의 수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저마다 한계가 있고, 우리는 누구나 자기가 가진 능력만큼만 할 수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잘 보살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남으로부터 온통 고통과 화로 가득한 말을 들으면 나의 마음이 지게 됨니다. 그의 고통만이 나에게 전해질 뿐, 다른 긍정적인 감정들게로 전해질 기회를 갖지 못하고 내 마음의 균형이 무너져버립니다. 그러므로 하루하루 삶 속에서 우리는 고통을 드러내지 않는 것들과 늘 접촉을 하도록 노력해야 노력해야 합니다. 푸른 하늘,.. 2022. 4. 18.
중생이 윤회하는 삼계(三界) 삼계(三界)는 중생이 윤회하는 세 가지 영역의 세계로 생명체가 머무는 세계와 전체 생사 유전하는 미혹의 세계를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세 단계로 구분한 것이고, 무색계(無色界)는 무한한 대해(大海)와도 같은 미혹(迷惑)과 고(苦)의 영역이므로 고해(苦海) 또는 고계(苦界)라고도 불린다. 삼계의 중생은 3종의 영역으로 된 이 세계로, 생사(生死)를 거듭하는 미혹의 세계 · 현세 · 인간 세계 · 법계(法界) · 심계(心界) · 중생계로 구분한다. 불교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세계를 지칭하는 말로 삼계(三界)라는 표현을 쓴다. 삼계는 나고 죽음을 거듭하는 중생들의 세계를 차원에 따라 욕계(欲界) · 색계(色界) · 무색계(無色界)로 분류한 말이다. 여기서 계(界)란 인도어 다투(Dhatu)에.. 2022. 4. 17.
자연은 커다란 생명체다. 중국 송대의 시인이며 서예가인 황산곡黃山谷의 글인데, 내 거처의 주련으로 쓸까 해서 골라놓고도 아직 빈 기둥인 채로 지내고 있다. 짧은 글이지만 진솔하고 기상이 있다. 자연을 한아름 안고 있어 가끔 읊어지는 시이다. 활짝 트인 하늘과 구름과 비, 산과 사람과 물과 꽃을 거느리고 있는 자연에 기대어 살아가노라면, 이 우주 대자연이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로 느껴질 때가 있다. 불교용어를 빌리자면, 산하대지 이대로가 살아 있는 청정한 법신法身이라는 것. 따라서 우리들 인간은 커다란 그 생명체에서 나누어진 한 지체인 셈이다. 만리청전(萬里靑天) 운기우래(雲起雨來) - 구만리 장천에 구름 일고 비 내린다. 공산무인(空山無人) 구류화개(九流花開) - 사람 없는 탕 빈 산에 시냇물 흐르고 꽃 피더라. ​ 맑게 갠 여름.. 2022. 4. 17.
온화한 얼굴 상냥한 말씨 비 개이자 개울물소리가 한층 여물어졌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흐르는 개울물소리에 귀를 모으고 있으면 내 안에 묻은 먼지와 때까지도 말끔히 씻겨지는 것 같다. 개울가에 산목련이 잔뜩 꽃망울을 부풀리고 있다. 한 가지 꺾어다 식탁 위에 놓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갓 피어나려고 하는 꽃에게 차마 못할 일 같아서다. 철 따라 꽃이 피어나는 이 일이 얼마나 놀라운 질서인가. 그것은 생명의 신비이다. 꽃이 피어나는 것은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다. 꽃의 정기를 머금고 있는 나무가 스스로의 충만한 삶을 안으로 안으로 다스리다가 더 견딜 수 없어 마침내 밖으로 터뜨리는 것이다. 자연계에서는 보면 꽃은 향기로운 미소다. 칙칙한 수목들만 있고 꽃을 피우는 나무나 풀이 없다면, 숲은 미소를 잃은 얼굴처럼 삭막하고 딱딱할 것이다.. 2022. 4. 17.
어진 이를 가까이하라. ​어떤 인연에서였건 간에 금생에 불법佛法을 만나게 된 것은 개인의 생애에 있어서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출가出家와 재가在家를 물을 것 없이 지혜와 자비의 가르침은 우리들 일상의 든든한 의지처가 될 뿐 아니라, 삶의 가치 척도가 된다. ​요즘 처럼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의지처와 가치 척도가 더욱 절실한 삶의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그런데 지나간 과거와 현재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처럼 바른 법은 만났으면서도 자신의 삶에 그 지혜와 자비의 교훈이 생활화되지 않고 보편화되지 않아 물에 기름 돌 듯 겉도는 수가 많다. ​불법의 문전에서만 서성거리다가 시류에 휩쓸리고만 경우가 얼마나 많았던가. 투철한 구도정신과 출가정신 없이 그날그날 무위도식無位徒食 하면.. 2022. 4. 17.
자연의 소리에 귀기울이라 법정스님-버리고 떠나기 새벽 예불을 마치고 나니 문득 비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간밤에는 처마 끝에 풍경 소리가 잠결에 들리던 걸로 미루어 바람이 불었던 모양이다. 이제는 풍경 소리도 멎은 채 소곤소곤 비 내리는 소리뿐이다. 밖에 나가 장작더미에 우장을 덮어주고 뜰가에 내놓았던 의자도 처마 밑에 들여놓았다. 그리고 요즘 막 꽃대가 부풀어오르는 수선화水선花의 분도 비를 맞으라고 밖에다 내놓았다. 비설거지를 해놓고 방에 들어와 빗소리에 귀를 모으고 있으니 참 좋다. ​ 오랜만에 어둠을 적시는 빗소리를 들으니 내 마음이 말할 수 없이 그윽해지려고 한다. 우리가 무슨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삶의 중요한 한몫이다. 그 소리를 통해서 마음에 평온이 오고 마음이 맑아질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소리의 은혜가 아닐 .. 2022. 4. 17.
시작할때 그 마음으로 이 글은 1998년 2월 24일, 법정스님의 명동 성당에서 강론했던 말씀으로, 김수환 추기경이 길상사 개원 법회에 참석해 축사 한 것의 답례 성격으로 이루어진 일이 있었다. 이해인 수녀님이 당시 강론을 녹음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스님께서는 강론에 앞서 이렇게 인사했다. “명동성당 축성 1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이 자리에서 강론을 하게 해 주신 천주님의 뜻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가난을 배우라 경제가 어려울 때일수록 우리가 각성해야 할 것은 경제 때문에 관심 밖으로 밀려난 인간 존재입니다. 너무 경제, 경제 하면서 인간의 문제가 뒷전으로 밀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윤리적인 규범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양심이 마비되고 전통적인 가치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돈 몇 푼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죽입니다. 대량생산.. 2022. 4. 17.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닦을 것인가 ​타이베이台北에서 겪은 일이다. 타고온 택시에서 내려 차비를 치르려는데 그 자리에서 차를 타게 된 청년이 차비는 자기가 공양할테니 스님들은 그냥 내리시라고 했다. 어느날 고궁박물관을 관람하고 나와 점심을 먹기 위해 채식 식당을 찾아 두리번 거리고 있을 때, 지나가는 아주머니 한 분에게 이곳에서 가까운 채씩 식당이 어디쯤에 있는지를 물었었다. 아주머니는 가던 길을 돌아서 우리 일행을 데리고 한참을가더니 깨끗한 식당을 알선해주고 갔다. 점심을 맛있게 먹고 식비를 내려고 카운터에 서니 아까 그 아주머니가 이미 점심값을 냈다는 것이다. 생면 부지의 외국 스님에게 베푼 두 불자의 선의善意를 보고 대만 불교의 한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종교란 도대체 무엇인가? 신앙생활이란 어떤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 2022. 4. 17.
깨달음과 닦음 깨달음悟과 닦음修은, 독립된 체험이나 현상이 아니라 상호 보완한다. 닦음 없이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고, 깨달음에 의해 닦음은 더욱 심화될 수 있다. 깨달음이 개인적인 체험이라면 닦음은 사회적인 의무와 나누어 가짐廻向으로 이어진다. 종교가 어느 문화 현상보다도 값질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체험에 그치지 않고 되돌리고 나누어 가지는 대사회적인 기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과 닦음에 완성이 있을 수 있을까?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제품이라면 완성이 있겠지만, 정신세계에 있어서 완성이란 우리가 두고두고 추구해야 할 이상이지 현실은 아니다. 깨달음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체험이므로 그 얕고 깊음의 개인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닦음 또한 마찬가지다. 어린이의 인식과 체험의 세계가 성인의 그것과 같을 수 없.. 2022.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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